사지(四知)
사지(四知)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5.07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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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보는 곳이 네 곳이나 있다’는 뜻으로 후한서(後漢書) 양진전(揚震傳)에 전하는 이야기이다.

중국 후한시대 양진(揚震)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비록 가세가 빈곤하였으나 학문이 높아 선비로서의 의기를 잃지 않아 사람들은 그를 관서공자(關西孔子)라 불렀다. 그는 50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벼슬길에 올라 당시 임금인 한안제(漢安帝)가 방탕한 생활로 소일하자 누구 하나 간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그가 나서서 상소를 올렸다. 그는 상소문에서 황제의 눈치만 보고 아첨만 일삼는 간신배들을 꾸짖으면서 “조정이 온통 흑백이 뒤섞여 구분할 수 없다(黑白混淆)”라는 유명한 성어의 말을 남겼다. 그 후 형주자사로 있다가 동래태수로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현령으로 있던 왕밀(王密)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평소 양진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고 있었다. 그는 양진이 동래태수로 부임하자, 극진히 대접하고서는 밤중에 은밀히 찾아와 황금 10근을 예물로 올렸다. 사실 왕밀은 평소 자신이 입은 은혜에 대한 보답의 뜻도 있었지만 앞으로도 그의 도움을 얻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양진은 정색하며 “나는 옛 친구인 그대를 알고 있는데, 그대는 어찌 나의 마음을 몰라 주는가”라며 극구 사양하자 왕밀은 “지금은 어두운 밤이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네(暮夜無知). 그러니 넣어 가지고 가서 노자에 보태어 쓰게”라고 하며 굳이 거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양진은 노기를 띠며 “이 사람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대가 알고, 내가 아는데(天知, 地知, 子知, 我知)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ㅇ”라며 재차 사양하자 왕밀은 부끄러워 더 이상 권하지 못하고 황금을 도로 가져갔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관리로서의 청렴함을 칭송하여 양자사지(揚子四知)라고도 했다. 이는 ‘세상에는 비밀이란 존재 할 수 없다’는 경계의 말이다.

지금 우리 정치계에서는 한 용감한 사업가가 자신이 운영하는 사업체의 안정과 번창을 기하기 위해 유력 정치인과 은밀히 유착하여 뇌물을 수수하고, 온갖 특혜와 비리를 저지르다 최근 그 정황이 드러나게 되자, 자신으로부터 뇌물 받은 정치인과 공직자의 명단 이른바 ‘리스트’를 작성하여 남긴 후 자살한 사건을 두고 큰 내홍을 겪고 있다. 그 리스트에 자신들의 이름이 적힌 인사들은 목숨까지 걸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으나, 과연 하늘같은 국민들은 그 말을 얼마나 믿어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욱 기가 막히는 일은 권력의 비호를 받고 온갖 추악한 부정을 저지르고 교도소에 복역하다 국민화합이니 뭐니 하면서 특별사면을 받고 마치 개선장군처럼 교도소 문을 나선 정상배(政商輩)와 같은 사람으로,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 같은 혜택을 입었다니, 과연 이 땅에 법과 정의란 것이 존재하는지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마당에 정치인이나 언론인이나 입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들 부정부패 척결을 외치고 있고, 대통령께서도 부정부패를 몰아내고 이 땅에 법과 정의를 바로 세울 것을 국민 앞에 천명한 바 있으나, 이를 실천에 옮기기까지의 길은 요원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한비자(韓非子)는 현학편(顯學篇)에서 “무릇 엄(嚴)한 집안에서는 사나운 노비가 없고, 인자(仁慈)한 어머니 밑에는 못된 자식이 난다. 이를 미루어 보면 위세(威勢)로는 난폭함을 다스릴 수 있으나 후덕(厚德)한 은정(恩情)으로써는 혼란을 막을 수 없다(威勢之 可以 禁暴, 而德厚之 不足以 此亂也)”고 했다.

오늘날 사회가 다양화하고 이해관계가 복잡할수록 양심이나 인덕으로만 질서를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나운 노비가 생기지 않게 계약을 엄격하게 지키고 신상필벌을 칼날같이 집행하는 주인이 있고, 망나니 자식이 생기지 않도록 회초리를 아끼지 않는 엄한 어머니가 있어야 하듯이, 흑백(黑白)이 혼효(混淆)되고, 곳곳에 비리의 온상이 독버섯처럼 뿌리내려 있는 이 같은 사회적 현실 속에서는 가히 혁명적 결단이 있지 않고서는 이 땅에 법과 정의를 결코 바로 세울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노동휘 성균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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