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9·28 수복과 탈출
제35화 9·28 수복과 탈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8.14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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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파 절 찾던 중 중년의 남자와 마주쳐 경계 풀리자 조밥과 삶은 고구마 가져다 줘
‘달려오면서 거칠어진 숨소리를 가다듬고 대문을 두드렸다. 몇 번을 두드려도 대문 안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초조해지기 시작하며, 친구도 왜 그러느냐고 묻고 있지만 다시 주먹에 힘을 넣어 다시 두드렸다. 이윽고 높은 대문이 스르륵 열리고 나보다 더 긴장된 몸짓의 중년의 남자가 의심스런 눈빛으로 우리를 훑어보았다.

나는 그 남자와 마주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으로 손을 뻗으며 눈을 감았다. “제발 이 사람이 공산당원이나 인민위원회 일원이 아니기를 비나이다.”

떨리는 눈동자로 그 남자의 표정을 다시 살피며 대문을 두드리게 된 이유를 말했다.

“우리는 인민군이 아닙니다. 서울에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다니던 학생인데 전쟁 통에 인민군의 군의관으로 강제 징집되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신의주로 가던 길인데 너무 배가 고파 부처님을 모시는 절에 가서 허기를 면해보려고 합니다. 이 근방에 절이 있습니까?”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묵묵히 내 말만 듣고 있었다. 여전히 경계의 눈빛으로 우리를 살펴보기만 할 뿐, 더 묻지도 않고, 절이 어디에 있다는 대답도 없었다. 그때 순간적으로 생각이 스쳐갔다. ‘학생이다’는 것을 증명할 신분증이 생각났다.

“여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증이 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호주머니 깊숙이 보관하고 있던 학생증을 내밀었다. 그 사람은 한참을 내가 건 낸 학생증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그러고서 손짓으로 대문 안으로 빨리 들어오라는 시늉을 하였다.

대문을 걸어 잠그고 불쑥 한마디를 했다.

“나 역시 가족과 피난을 갔다가 인민군이 북쪽으로 도망갔다고 해서 며칠 전에 왔습니다. 집을 비워놓고 갔기 때문에 궁금하기도 하고,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기도 해야 하고, 가족들은 피난 간 친척 집에 놓아두고, 나 혼자 집에 와서 이렇게 숨어 지내고 있습니다. 대문을 바로 열지 않은 것은 문틈으로 어떤 사람들인지, 우리 동네의 머슴살이하던 공산당원인지 알아보느라고 그랬던 것입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에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던 나는 그 남자의 대답에 긴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쉴 수 있었다. 권총에 가 있던 손을 슬그머니 풀었다.

남자는 가축을 길렀던 흔적이 남아있는 축사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배가 고파 절을 찾던 우리의 말을 떠올리며 조밥과 삶은 고구마를 가져다주었다. 자기도 공산당원이 아니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우리를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만약 그 남자가 인민군이나 인민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었다면 우리 둘은 영락없이 탈영병으로 몰려 죽음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를 축사로 안내한 남자는 집안으로 들어가, 바지저고리 두 벌을 우리에게 건넸다. 입고 있던 낡은 인민군 군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자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 사람은 우리의 옷과 신고 온 군화까지 수거하더니 축사 모퉁이에서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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