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노(耆老)’의 가치에 대한 단상
‘기노(耆老)’의 가치에 대한 단상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4.28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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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광규는 ‘늙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읊었다. 그렇다. 유한한 뭇 생명은 모두 늙음이 있다. ‘한 손에 막대 잡고/ 한 손에 가시 지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이 시는 고려 후기의 문신 우탁(禹倬·1263∼1343)의 ‘탄로가(歎老歌)’이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라는 노랫말도 물같이 흐르는 젊음을 아쉬워하는 마음에서 지은 가사일 것이다.

조선시대에 기로소(耆老所)라는 것이 있었다. 연로한 퇴임 문신(文臣)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명예기구로서 정식 명칭은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였다. 여기서 ‘기(耆)’란 70세 나이로서 연배가 높고 인생의 질곡(桎梏)을 다양하게 겪었고 덕이 있다 하여 ‘연고후덕(年高厚德)’의 뜻을 갖는다. 80세가 되면 ‘노(老)’라고 하여 생물학적 늙음보다 철학적 노숙함의 의미를 갖는다. ‘기소(耆所)’ 또는 ‘기사(耆社)’라고 줄여서 쓰기도 한다. 기로의 모임은 중국 당·송 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부산 동래에도 1846년에 결성한 기영회(耆英會)가 있다. 기영계(耆英契)에서 출발한 기영회는 그동안 장학금, 소외계층학생 복지사업비, 결식아동 급식지원비를 기탁하는 등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렇듯 ‘늙을 노(老)’ 자는 보면 볼수록 지혜와 무한한 가능성을 느끼게 한다. 다만 운용을 잘못하다 보면 험담꺼리로서 세인의 입길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노송(老松). 평지의 거북등 같은 아름드리 황장목(黃腸木)을 대할 때는 한없이 믿음이 간다. 더욱이 만학천봉(萬壑千峰) 층암절벽(層巖絶壁)에 늘어진 노송의 여유는 더할 나위 없이 여유로움을 느낀다. 온갖 풍상 다 겪은 듯한 용트림의 모습에 골짜기를 타고 올라온 구름 바람이 건듯 불기라도 할라치면 죽이고 죽는 비정한 세간사에 손사래 치듯 어깨춤 추고 고금사(古今事)를 솔 향으로 풍기는 그 모양새에서 감히 멋을 느끼지 않을 자 누가 있겠는가!

노숙(老熟). 오랫동안 한가지 일에 많은 경험을 쌓아서 노련함을 말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짚신을 삼아 시장으로 갔다. 단골손님이 많은 아버지는 장을 펼치기도 전에 제값 받으면서 짧은 시간에 다 팔았다. 그러나 아들은 흥정만 있을 뿐 좀처럼 팔리지 않았다. 아들은 임종을 앞둔 아버지더러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 비결이 무엇입니까?” 아버지는 겨우 입을 열면서 ‘털∼ 털∼털∼’이란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아들은 짚신을 곱게 보이게 하는 마무리 손질의 중요함을 깨달았다.

노서(老鼠). 고상안(高尙顔, 1553∼1623)이 늙은 쥐의 지혜에 대해 쓴 수필 ‘효빈잡기(效嚬雜記)’가 있다. ‘젊은 쥐가 늙은 쥐의 경험을 과소평가했다가 용서를 빌고 다시 대접했다’는 말로 내용을 요약할 수 있다. 불에 탄 재로 새끼를 꼬아 바치면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어명에 오랜 현장경험과 연륜으로 터득한 기술과 노하우인 ‘암묵지(暗默知)’로 고려장을 없애버린 것도 노파(老婆)인 늙은 어미의 지혜 덕분이었다.

노승(老僧). ‘세상만사는 이미 운명에 따라 정해져 있는데 허공에 뜬 인생은 헛되이 바삐 헤매도다(萬事皆有定 浮生空自忙)’. 김삿갓의 시다. ‘만 리 뻗은 흰 구름 푸른 산봉우리에서 구름수레 학가마 타고 한가로이 지내네(萬里白雲靑?裡 雲車鶴駕任閑情).’ 산신의 가영(歌詠)이다.

납자(衲子)라도 대자유인이면 멋이 있다. 폐포(弊袍)라도 집착하지 않으면 수행인이다. 약관(弱冠)에 무정세월을 더하면 노구(老軀)가 된다. 처녀(處女)가 죽장을 짚는 세월이 되면 노파(老婆)가 된다. ‘청춘 꿈을 놀라 깨니 백발 설움 더욱 깊다’는 말도 있다. ‘갈대꽃에 바람 스치니 백설 같은 흰머리라’는 말도 있다. ‘붉은 꽃이 열흘 가지 않고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의미다. 이 말을 한자로 표현하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월만즉휴(月滿則虧)’가 된다. 월영즉식(月盈則食)이라고도 하는 이 말의 뜻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세상사는 흥망성쇠가 있다는 말이다.

젊음도 마찬가지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배우기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늙기 쉬운 것이 인생이다. 자전거 페달을 지속적으로 밟지 않으면 나아가지도 않고 넘어지듯이 열심히 살아온 인생의 후반기에 흔적으로 받는 떳떳한 훈장이 ‘늙을 노(老)’ 자다. 용기, 도전, 철(凸) 등이 젊음의 상징이라면 지혜, 겸손, 요(凹) 등은 노년의 멋이다. ‘따뜻한 산비탈의 암꿩이 제철 만나 좋아하는 것’이란 의미의 ‘山梁雌雉 時哉時哉’이 약관의 용기라면 ‘봄 꿩이 스스로 울어 자기 위치를 알려 스스로 구설수에 오른다’는 의미의 ‘春雉自鳴 口舌紛紛’은 노년이 삼가야할 행동이다.

노년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늙은 말이 콩 마다 할까’ 혹은 ‘짧은 혀로 멀리 침 뱉기’라는 말보다 ‘니가 뭔데, 내가 낸데’라는 자기중심적 좁은 생각과 얕은 지식에 집착하는 아집일 것이다. ‘또 가지려 하는 노욕’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무조건 삼가고 경계해야할 대목이다.

기(耆)가 닭 무리 속의 학(鶴) 같아야 한다면 노(老)는 잡목 속의 금강송 같아야 한다. 기노의 가치는 무사무욕(無私無慾), 겸손, 배려가 발휘될 때 멋이 있다. 목장지폐(木長之弊)의 비유보다 인장지덕(人長之德)의 표현으로 쓰일 때 그 진가가 발휘된다. 당연히 편견, 오만, 거만, 아집, 독선, 노욕은 버려야 한다. 이제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멋진 기노를 나부터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야겠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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