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본질이 영어교육에 앞선다
교육의 본질이 영어교육에 앞선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8.13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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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영어 발음은 본토 발음만큼 좋았고, 문법은 말할 것도 없고, 영작문은 미국에서 그 대학에 교환교수로 와 있는 본토 사람보다 더 정확했다.
십 수 년 전, 지방대학의 영문과 교수 한 분은 미국의 문턱도 밟아보지 않고 영어학(英語學)교수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의 영어 발음은 본토 발음만큼 좋았고, 문법은 말할 것도 없고, 영작문은 미국에서 그 대학에 교환교수로 와 있는 본토 사람보다 더 정확(的確)했다.

이 교수가 영어학 교수가 될 만큼 영어를 잘 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지방의 중학교 시절부터 영어에 미쳐, 되건 말건 친구에게 영어로만 말을 하였고, 집에서도 영어만 써서 가족들로부터 구박까지 받았다. 어쩌다 서양 사람이 시골 동네에 나타나면 만사 제쳐 놓고 다가가 영어로 말을 걸었다. 한 번은 독일 사람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가 점잖게 망신을 당한 일도 있었다. 그 독일 사람이 독일어도 그렇게 열심히 해보라는 영어의 답변이었다. 하여간 그 교수는 자기 고장 지방대학의 영문과로 진학하여 여러 가지 자격(통역, 박사학위)을 갖추고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울산지역 영어교사들이 2010년 영어로 진행하는 영어수업에 대비하여 각종 연수에 뜨거운 방학을 뜨겁게 보내고 있다. 많은 교사들이 자발적, 자율적, 개인적 연수를 받고 있어서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자칫 이런 영어열기가 어쩔 수 없는 연수라면, 특히 배우려는 학생들이 영어 사용에 무관심하다면 영어열기에 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

상투적인 학습동기의 중요성을 말할 때, ‘소를 강까지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목마르지 않은 소한테 강제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영어공부에 욕심이 없는 학생들에게 영어교사가 아무리 영어를 잘 구사하여 영어로 수업을 한다고 하여도 학습 성과는 비경제적일 수밖에 없다. 학생들을 영어에 미치도록 하는 방법이 영어로 수업하는 것이라면 조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어는 물론 공부하려는 의욕이 없는, 그것이 누적된 학습결손에 의한 자포자기일지라도 학생들에게 영어로 수업을 받도록 강요하는 것은 교육의 본질을 벗어나는 교육행위이다. 여기서 시시한 영어 실력의 개인차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 먼저 ‘사람으로서 교육을 받으려는 갖춤이 되어 있느냐?’를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다시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풍토가 되찾아져야 한다. 선생님을 존경하는 분위기가 되면 가정에서부터 ‘사람으로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가 자연스럽게 길러지며, 이유 없이 공부해야 한다가 성립된다. 공부는 이유 없이 하는 경지가 최고의 경지이다. 즉, 공부가 재미있어서 그냥 하는 것이다. 부모부터 ‘돈만 잘 벌면 되지’의 풍토에서 자녀들이 공부하는 일은 ‘신(神)이 내린 명령이다’의 종교적 차원으로 올라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아울러 영어교사 자신들은 영어가 그토록 재미있는 일인가 되새겨보아야 한다. 해외연수를 가는 교사가 수업에 들어가서, ‘내가 미국에 가보니까…’의 자랑거리를 장만하기 위하여 연수를 다녀온다면, 집에서 에어컨 켜 놓고 비디오테이프 한 개를 스무 번쯤 보는 것만 못하다. 영어교사가 미국어학연수를 가는 것은 ‘틀려도 좋으니 나의 영어구사 능력을 실습해보겠다’는 목적이어야 한다. 이것이 되어야 학생들에게도 ‘영어, 틀리면 배워서 고치면 된다.’는 배짱을 가르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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