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과 채움의 정치(政治)
비움과 채움의 정치(政治)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4.27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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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구 총리는 지난 2월 17일 공식 취임 후 63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역대 최단명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 이는 현대판 ‘재상’이라 할 수 있는 국무총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괄하는 권한 외에도 유력 대선주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자리다. 이완구 총리도 우여곡절 끝에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해 총리직에 오르면서 단숨에 차기 대권을 바라보는 반열에 올라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낙마하고 말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식물 국무총리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나라가 되었다. 돈과 법보다 무서운 건 말이었다. 국정 2인자를 벼랑 끝으로 내몬 건 그의 가벼운 입이었다.

이 총리의 거짓 해명이 거듭되자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도덕적 해이)에 빗대 ‘오럴 해저드(oral hazard·언어적 해이)’라는 비아냥거림도 이어졌다. “왜 그렇게 말을 바꾸느냐”는 질타엔 엉뚱하게도 “충청도 말투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게 부정적인 여론을 더 자극했고 결정적인 낙마의 계기가 되었다.

왜 진실이 드러날 걸 알면서도 부인부터 하는 걸까? 친분이 노출될 경우 쏟아질 낙인찍기를 우선 피하려는 방어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또한 나중에 밝혀져도 거짓말을 했다는 데 대한 사회적 제재가 약하기 때문이라는 진단도 있다. 이번 사건은 세련된 정치적 화법에 대한 훈련이 미숙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껏 한국 정치에서 거짓말은 필요악(必要惡)으로 인식되곤 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위정자(爲政者)의 말 바꾸기에 아주 신물이 난다는 여론이 거세다. 닉슨 대통령도 워터게이트 해명 과정에서 거짓말로 물러난 것이다. 이젠 한국 정치권에서도 거짓말을 원로정치인의 성희롱처럼 금기시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총선이 1년 앞으로 다가오면서 지난 선거 낙선·낙천자의 정계복귀를 노리는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울산에서도 상당수 지역구에서는 현직과의 재대결 등 흥미 있는 승부가 예상되는 만큼 지역정가의 관심 역시 집중되고 있다. 대한민국 제20대 총선은 2016년 5월 30일부터 4년 임기의 제20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로 2016년 4월 13일에 치러진다. 1년이 채 남지 않았다. 이러다보니 자천타천 국회의원 희망자가 활개를 친다. 제20대 총선에 출사표를 준비하는 다수의 출마예상자들은 자신의 깜냥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고 있는 상황이다. ‘깜냥’은 스스로 일을 헤아림, 또는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농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논에 물이 가득 차 있으면 벼가 잘 자라는 줄 안다. 하지만 논에 물이 항상 차 있으면 벼가 부실해서 하찮은 태풍에도 잘 넘어진다. 가끔은 물을 빼고 논을 비워야 벼가 튼튼해진다. 우리도 때로는 삶의 그릇에 물을 채워야 할 때가 있고 때로는 물을 비워야 할 때가 있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우고 또 비우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비움과 채움에도 때가 있다는 시절인연을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넘쳐난다면 좋은 세상이 될 터인데 그러지 못한듯하여 아쉽다.

사람과의 만남도, 일과의 만남도 소유물과의 만남도, 깨달음과의 만남도, 욕심이나 과욕과의 만남도, 유형·무형의 일체와의 만남에는 모두 때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만나고 싶어도 시절인연이 무르익지 않으면 지천에 두고도 못 만날 수 있고, 아무리 싫다고 발버둥을 쳐도 시절의 때를 만나면 기어코 만날 수밖에 없으며, 아무리 고사하여도 때를 만나면 권력자의 위치에 다다른다. 모든 마주침은 다 제 인연의 때가 있는 법이다. 이것이 ‘시절인연’이다.

내년 총선에 출마를 희망하는 정치인은 자신의 ‘깜냥’ SPEC(스펙)을 분명히 인지하고, 거짓말하는 ‘양치기정치인’이 아닌, 유권자를 섬기며 지역과 나라의 발전만을 고집하는 참 정치인들만의 대결의 장(場)이 되기를 기대한다.

<신영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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