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전의국의 의료진들은 평양 중앙병원에 집결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이미 모든 작전은 수포로 돌아간 후였다. 소속 부대별로 재정비해서 평양을 사수하기로 한 계획 역시 공염불이 되고 어느 누구도 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저 하루 빨리 이 전쟁이 끝나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그 어떤 희망도 존재하지 않았다.
집단행동이 불가능해진 우리는 다시 신의주 집결을 약속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대학 동기 김OO와 북쪽으로 길을 잡았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본 평양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피난을 떠나 묘한 정적만 감돌았고, 간간히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인민군 간부들과 공산당원들이 북쪽으로 도주하는 모습도 보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시시각각 평양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었다.
더 이상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던 우리는 평양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야행성을 포기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걷다가 지치면 아무 집이나 찾아 들어가 졸린 눈을 붙이다가 섬뜩한 꿈에서 깨면 정신없이 걷고 또 걸었다. 찬바람은 옷깃을 파고들고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허기진 배는 사정없이 쓰려오고 갈증으로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이때의 평양 시내 모습은 김은국의 장편소설 ‘순교자(을유문화사, 1990)’에 잘 그려지고 있다. 국군이 들어간 10월 두 째 주에는 피난 갔던 시민들이 다시 돌아와 국군을 열렬히 환영했다. 평양입성을 고대하던 국군의 이북 출신 장교들은 선봉이 되어 평양에 들어가 친척들의 안부를 묻기에 정신이 없었다. 일부는 살아있다는 사실만 갖고도 모르는 사람을 얼싸안고 울기도 했지만 상당수는 대개가 잘 모른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펑펑 울었다.
‘평양을 벗어날 때는 걸음을 재촉하며 걷던 우리 두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발길을 서둘지 않았다. 서로 의논한 것은 아니지만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할 용의가 있었고, 공황에 빠져버린 두뇌는 이미 상부의 지시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더 이상 걸음을 옮길 여력이 없을 만큼 지친 몸을 어느 길가에 뉘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다가 순간 무모한 생각이 치솟았다. 눈앞에 보이는 마을을 향해 달렸다. 걷기조차 힘들었던 내가 어디서 그런 괴력이 솟아났는지, 한달음에 도착한 곳은 척 보기에도 부유한 기와집 대문 앞이었다. 의과대학 친구는 조심스런 표정으로 나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