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비
꽃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4.1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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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좋아하고 가고 싶은 등산 코스는 설악산 공룡능선 코스다. 용대리에서 출발해 백담사를 거쳐 수렴동 대피소를 지나 만경대에 올라 내려다보는 설악산 풍경은 가히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만경대에 서면 바로 코앞에 오세암이 보이고, 왼쪽으로 공룡능선의 장엄한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그 산세가 너무나 빼어나게 아름다운 용아장성이 한 폭의 병풍을 그리고 있다. 멀리 소청, 중청 대청봉까지 일벌하고 나면 설악산을 다 본 듯한 착각에 빠지고 만다. 하긴 그 이름도 일만 가지 풍경을 다 볼 수 있다 해서 만경대라 이름 지어지지 않았겠는가?

만경대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오세남은 내가 꼭 들러서 삼배를 드리는 암자다. 혹시나 파랑새가 날아오르고 꽃비가 흩날리는 풍경을 나도 한 번쯤 볼 수 있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오세암은 꽤나 뜻 깊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암자다. 아주 먼 옛날, 오세암에는 스님 한 분과 부모를 여읜 다섯 살 배기 어린아이가 함께 살고 있었다 한다.

어느 해 겨울, 스님은 겨울나기 식량을 구하려고 어린 동자승만 남겨놓은 채 아랫마을로 내려갔는데 갑자기 내린 폭설로 다시 암자로 돌아올 수가 없게 되었다. 한 치 앞도 못 보게 쏟아지는 폭설이 사흘 동안 계속되었는데 남겨놓고 온 동자승 생각에 스님은 눈도 한 번 못 붙였다.

눈이 그치자마자 스님은 앞뒤 가리지 않고 뛰다시피 달려가서 암자에 도착했다. 틀림없이 어린 것이 굶어죽어 있을 거라고 단정한 스님은 시신이나 찾아 양지쪽에 잘 묻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엌과 행랑채, 사찰방 이곳저곳을 다 찾아보아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왈칵 겁이 난 스님이 마지막으로 법당 문을 여는 순간, 스님은 기절초풍하고 말았다. 틀림없이 굶어죽었을 거라 확신했던 동자승이 방긋 웃으며 자기를 쳐다보지 않는가.

“아이구, 이놈아 살아있었구나. 이 어찌된 일인고? 사흘 동안 밥도 못 먹고 죽은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멀쩡하다니.” “스님, 죽기는 왜 죽어. 나 배 안 고팠어. 저기 앉아있는 저 아저씨가 매일 밥을 주어서 맛있게 먹었어. 정말 괜찮단 말이야.”

“뭐야, 아저씨가 밥을 주었다고?”

아이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바로 관세음보살상이었다. 정신이 번쩍 든 스님은 그때서야 관세음보살님이 아이를 돌보아 주신 것을 깨닫고 황급히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파랑새 한 마리가 관세음보살상에서 나와 절 마당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급히 아이의 손을 잡고 절 마당까지 뛰어나오자 파랑새는 절 마당을 지나 파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오, 관세음보살님! 부디 잘 다녀가시옵소서. 아이를 보살펴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 그 순간, 파랑새가 날아간 맑은 하늘에서는 갑자기 꽃비가 날리기 시작했고, 온 누리가 꽃비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감격한 스님은 장엄한 이 풍경에 너무나 가슴이 벅차 한없이 꽃비를 맞으며 합장하고 서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어제 새벽 등산길에 흩날리는 벚꽃을 맞으며 걸으니 내가 꽃비를 맞고 있다는 묘한 생각에 마음이 상쾌해지기 시작했다.

“아, 그래, 나도 꽃비를 맞는구나. 오세암의 그 동자승처럼 나도 꽃비를 맞는구나.”

온몸에 덮여 있던 묵은 때가 하나하나 씻겨 나가듯 내 머리는 맑아지기 시작했고, 평소에는 그저 그랬던 파란 새싹이 돋아난 굴참나무와 연초록 물감을 뒤집어쓴 늙은 오리나무가 특별하고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인다. 꽃비. 나는 오늘도 꽃비를 맞고 밟으며 함월산 새벽길을 조용히 걷고 있다.

류관희 약사/전 유영당약국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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