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부입법(請負立法)
청부입법(請負立法)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4.12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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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부살인(請負殺人)’이란 말은 자주 들어도 ‘청부입법(請負立法)’이란 말은 귀에 설다. 그래서인지 청부입법이란 말은 섬뜩한 느낌부터 든다. 하지만 엽기적 표현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른바 ‘청부입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요새 그 흔한 ‘상생(相生)’이란 용어의 동의어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찌하여 그런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일까.

청부입법이란 한마디로 ‘정부가 만든 법안을 국회의원에게 청탁해서 의원 이름으로 발의하는 관행’을 일컫는다. ‘차명입법(借名立法)’ 또는 ‘우회입법’이라고도 하고 ‘정부와 여당이 주로 사용하는 편법’이라는 해석도 따라붙는다. 뜻이 그렇다면 ‘청부입법’보다 ‘청탁입법(請託立法)’이란 표현이 차라리 더 부드러울 법도 하다.

따지고 보면 정부도 법안 제출권이 있다. 하지만 ‘정부법안’ 발의는 심사 절차가 열 몇 가지나 될 정도로 까다롭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기대는 것이 청부입법이라는 편법이다. 정부법안 발의는 과정이 까다롭다. 관계부처 협의와 공청회, 국무회의 등을 수없이 거쳐야 한다. 이와는 달리 ‘의원법안’은 국회의원 10명 이상만 서명하면 바로 발의할 수 있다.

결국 법안을 수월하게 제출하고 싶은 정부, 입법실적 올리고 싶은 국회의원 양쪽 모두에게 좋은,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입법발의 관행이 청부입법인 것이다. 입법실적 올리기를 원하는 국회의원이 정부에 법안 달라고 조르는 ‘역(逆)청부입법’도 늘고 있다는 게 여의도 주변 소식통의 전언이다.

요즘 중앙일보가 작심하고 소매 걷어붙인 일이 있다. ‘심층진단 국회의원’ 슬로건을 내세운 소위 ‘국회 체질 개선’을 겨냥한 연재물이다. ‘청부입법’ 문제도 심층진단의 릴레이보도 과정에서 나왔다. 지난 8일에는 ‘청부입법, 낙하산 자리 만드는 통로였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는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가 예시됐다. 지난해 10월 충남 아산의 R의원이 외국인에 대한 원격의료를 허용하자는 취지에서 발의한 ‘국제의료사업지원법안(의료지원법)’은 청부입법의 좋은 본보기라고 소개했다. 여당 소속 R의원의 발언이 흥미를 자아낸다. “정부 발의 법안은 야당에 두들겨 맞으니 의원입법으로 해야 공격이 덜하다.”

차명(借名) 당사자인 R의원과 보건복지부엔 청부입법으로 무슨 이득이 있을까. 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익명을 원한 여당 의원은…’정부가 협회 등 낙하산 기구를 만들어 세금으로 억대 연봉을 주고, 해당 의원은 지역사업 배정 때 우대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통과되면 복지부 장관은 위원회 임명권을 갖고 위원회는 부처 예산을 지원받는다.”

청부입법이 낙하산 자리를 만드는 통로였다는 점을 밝혀낸 기사다. “청부입법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한 기자는 “청부입법 가운데 의료지원법 같은 ‘○○○지원법안’의 경우 대개 자리, 예산, 민원의 대가가 따른다고 복수의 의원이 증언했다”는 말도 덧붙인다

찬물에도 순서가 있듯이 청부입법에도 우열(優劣)이 있는 모양이다. 정부가 실세 의원이나 여당 지도부에는 알아서 찾아가 완성된 모양새의 법안을 선물처럼 건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법안 발의 실적을 한 건이라도 더 올려야 한는 초·재선이나 야당 의원들에게는 그저 ‘꿈’일 뿐이다. 그래서 벌어지는 것이 ‘청부법안의 수주(受注) 경쟁’이다.” 수주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청부법안이 의원법안보다 완성도가 높고 통과도 잘돼 의정활동의 좋은 홍보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여하간, 청부입법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청부입법이 울산시의회와 구·군의회에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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