蓼島(요도)와 정몽주 ②
蓼島(요도)와 정몽주 ②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4.07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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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行舟形(행주형) 요도

“달가닥달가닥, 달가닥달가닥” 무슨 소리냐구요? 신라의 육조대신(六朝大臣)들이 말을 타고 요도에서 경주의 왕궁(王宮)인 반월성(半月城)으로 출근하는 소리입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구요? 1937년 7월의 언양면세일반(彦陽面勢一班)에 수록된 설화에 의하면 요도에는 신라시대 육조대신의 관사(官舍)가 있어 이들이 그곳에 거주하면서 신라 조정 80리 길을 조신들이 내왕하였다고 합니다. 또 왕은 신라 말기에 재상인 나승상(羅丞相)에게 이곳을 요도(蓼島)로 부르게 하였다고 합니다. 비록 말로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를 기록한 설화이긴 하지만 상당히 신빙성이 있습니다. ‘세일반(勢一班)’이란 ‘세일람’과 같은 뜻으로 그 때 당시에 언양의 면적, 인구, 설화 등을 기록한 자료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곳이 얼마나 살기 좋은 천하명당이었기에 다른 곳을 다 놓아두고 이 먼 곳까지 대신들이 왕래했을까요?

요도는 가지산과 고헌산의 정기를 남천과 감천이 모아 결집시킨 곳입니다. 꽃을 품은 화장산이 그 향기를 쏟아내 요도로 보냅니다. 등 뒤에는 고무산이 달리던 노루가 어미를 돌아보는 심정으로 포근히 감싸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요도는 풍수지리학적으로는 行舟形(행주형)입니다. 행주형은 그 지형이 배가 나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배는 예부터 부의 상징입니다. 배가 딱 닻을 놓고 돛대를 올리고 있으니 사람이 모이고 재물이 모입니다. 인물이 나고 문화가 번성합니다. 언양이 선비의 고장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KTX와 고속도로가 지나고 전국에서 불고기를 찾아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 또한 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울산도 대표적인 행주형 도시입니다. 배의 앞부분이 U자 형으로 둘러싸인 행주형입니다. 그래서 21세기에 들어와 풍요를 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삼국유사는 7세기 말 신라의 전성기에는 왕경에만 17만8천936호에 100만 여명의 인구가 살았고 35개의 거부(巨富)의 집이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장안,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와 함께 세계 4대 도시 중의 하나였죠. 그러니 오늘날 서울처럼 화재, 홍수, 안전, 환경오염 등 얼마나 많은 불안요인들이 있었겠어요.

실제로 596년(진평왕 18)에는 서천 가까운 곳에 있던 영흥사에서 불이 나자 주변의 민가 350여 채가 함께 피해를 입어 임금이 직접 찾아 구휼(救恤)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인구 집중화로 다닥다닥 붙은 주택가에 불이 났을 때 오늘날과 같은 소방시설이 없던 시절, 화재는 왕경 사람들에게 끔찍한 위협이었을 것입니다.

땔감으로 숯을 만들기 위해 마구잡이로 벌목을 하여 큰비가 오면 홍수 또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그 시기 지진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779년(혜공왕 15)에는 왕경에 지진이 일어나 1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강은 좁고 인구가 많아 하수도 시설이 부족해 물 오염 또한 심각했을 것입니다. 이러니 왕경에 사는 유력자들이 얼마나 도시를 탈출하고 싶었겠어요. 아마 육조대신들도 물 좋고 경치 좋은 전원을 찾아 이 곳 요도에 관사나 별장을 짓고 살면서 골치 아픈 왕경을 벗어나 말을 타고 가끔 출퇴근을 했을 것입니다.

3. 정몽주의 유배생활

포은 정몽주가 이인임의 배명친원(排明親元) 외교정책에 반대하다 언양 요도에 유배를 온 것은 언제이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간 것은 언제일까요? 사료마다 포은이 요도에 머문 시기가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여러 사료를 종합해 볼 때 1375년 말에 요도에 와서 1377년 3월에 해배(解配)되어 개경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거의 지배적입니다. 1375년 정몽주가 유배를 떠났다는 사실은 그 당시 박상충과 관련한 다음 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박상충은 1375년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책에 대하여 임박(林樸)·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고 친명책을 주장하였다. 뒤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어 정몽주 등과 함께 친명책을 쓸 것과 북원(北元)의 사신과 그 수행원을 포박하여 명나라로 보낼 것을 상서하였다. 그 해 간관 이첨(李詹)·전백영(全伯英) 등이 상소하여 북원과 통하는 것을 반대하고 친원파 이인임과 지윤(池奫)의 주살을 주장한 것에 연좌되어 친명파인 전녹생(田祿生)·정몽주·김구용·이숭인·염흥방(廉興邦) 등과 함께 귀양 가던 도중 별세하였다.” ▶다음에 이어짐

<조상제 강북교육지원청 교수학습지원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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