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전비후(懲前毖後)
징전비후(懲前毖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4.01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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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이전에 잘못된 것을 후회하고 훗날을 삼가 한다’ 는 뜻으로 시경(詩經) 주송(周頌)에 전하는 이야기이다.

중국 고대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는 주공(周公) 단(旦)이란 아우가 있었다. 그는 형인 무왕을 도와 상(商)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로서 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른 성왕(成王)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면서 나라의 기초를 다져왔다.

그러나 이때 그를 시기하는 반대 세력으로 관숙(管叔)과 채숙(菜叔)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은밀히 “주공이 조카인 성왕을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문이 성왕에게 전해지자 성왕 또한 주공을 의심하고 차츰 주공을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분위기를 감지한 주공은 모든 관직을 버리고 도성을 벗어나 멀리 외진 시골에 은거하고 말았다.

이것을 기회로 관숙과 채숙 무리들은 정권을 찬탈하기 위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때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성왕은 급히 사람을 보내어 주공을 모셔 와서 다시 그에게 섭정을 맡기고 난을 평정토록 하였다. 평소 간신배들의 약점을 잘 간파하고 있던 주공인지라 일거에 반격을 가하여 관숙과 채숙을 사로잡아 난을 평정하게 되었다.

그 후 다시 조정에서 정사를 관장하다가 성왕이 장성하여 정사를 관장할 나이에 이르자, 그때서야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때 성왕은 감격하여 말하기를 “과인이 지난날의 잘못을 뼈아프게 새기면서 앞으로의 일을 경계하겠다(子其懲而 毖後患)”라고 말하였다.

이는 지난날의 잘못을 살펴 자성하고, 앞으로의 일을 경계한다는 의미의 말이다.

우리에게도 조선조 선조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고 난 후 당시 재상으로 있던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께서 전쟁의 참화를 후회하고 뒷날을 경계하기 위하여 징비록(懲毖錄)을 남긴 바 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지난날 일제의 통치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자마자 동족상잔의 참혹한 6·25전쟁을 겪었고, 그 이후 남북이 분단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서해상을 경계하던 우리의 천안함이 적들의 공격으로 폭침되었다. 적들의 소행은 꽃다운 젊은 청년 46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얼마 전에 그 5주기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일부 인사들은 이처럼 명백한 적의 소행을 두고도 그것을 부인하고 우리 사회 여기저기에서 오히려 적을 고무하고 찬양하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더욱이 우리 군의 수뇌부에 있는 고급 장교들이 무기를 도입하면서 추악한 비리를 저질러 값비싼 군 장비를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이는 밤에 문을 열어놓고 제 집에 들어오는 도둑에게 인사하는 소위 개문읍도(開門揖盜)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마침 대통령께서도 기왕지사(旣往之事)의 잘못을 후회(懲前)하고 장래를 삼가하며(毖後) 부정부패의 척결을 국민 앞에 공헌하고 있는 마당이니 ‘징전비후’의 고언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인근 국가인 싱가포르나 대만의 부패 척결의 예를 살펴보면 지도자 스스로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척결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특히 부패사범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치 엄한 처벌을 감행하여 국가의 법질서를 바로잡아 놓았다. 그로 인해 오늘날 그들 국가들은 모든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질서 있고 풍요로운 복지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노동휘 성균관 자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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