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 그 ‘무소유’의 철학
법정 스님, 그 ‘무소유’의 철학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3.12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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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은 우리 사회에 ‘무소유’의 참된 진리를 남긴 법정 스님이 입적한 날이다. 법정(法頂) 스님 5주기를 맞은 가운데, 다시금 그의 말이 던진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언어는 공허하다’며 침묵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던 법정 스님은 법문의 말미에서 ‘내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니 나머지는 저 찬란한 꽃들에게 들으라’고 맺곤 했다.

스님은 자신의 저서 ‘산에는 꽃이 피네’에서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富)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라는 명언을 남겼다.

목숨처럼 간직했던 ‘무소유’의 철학을 끝까지 실천해 보인 큰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엔 형형색색 만장(輓章)도, 꽃상여도 없었다. 간소한 행렬을 지켜보며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추모객들의 기도소리만이 허공에 메아리칠 뿐이었다. 스님이 생전에 “내가 어떻게 가는지 보라”며 가장 간소한 장례를 부탁했듯이 빈소에는 과일 하나, 떡 한 조각도 없었다.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법정 스님은 같은 피를 나눈 민족끼리 벌인 한국전쟁의 참상을 겪으며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서 고민한다. 그는 전남대 상대 재학 중이던 1954년 마침내 출가(出家)를 결심하고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날, 집을 나선다. 그리고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 선사(曉峰禪師)’를 만나 대화한 뒤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는다.

효봉 스님은 출가 전, 일제강점기 조선인 최초 판사였다. 어느 날,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동포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뒤 억누를 수 없는 ‘민족적 양심’의 가책 앞에서 걷잡을 수 없는 갈등에 휩싸인다.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방황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이찬형(李燦亨·속명)은 판사직을 버린 채 가출, 3년 동안 엿장수를 하며 전국을 떠돈 뒤 금강산으로 들어가 신계사 보운암의 석두(石頭) 화상 앞에서 머리를 깎는다. 이후 토굴을 파고 필사적인 정진(精進)을 하는 등 피눈물 나는 자신과의 싸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런 훌륭한 스승 앞에서 승가에 귀의한 법정 스님은 평생 출가수행자로서 지켜야 할 본분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특히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산문집을 통해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산문집의 제목처럼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끊임없이 보여줬다.

스님은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會主)를 한동안 맡았을 뿐, 그 흔한 사찰 주지 한 번 지내지 않았다. 2003년에는 길상사 회주 자리마저도 내놓았다. 하지만 정기법문은 계속하며 시대의 잘못은 날카롭게 꾸짖고, 세상살이의 번뇌를 호소하는 대중들에게는 가슴속에 절절히 파고드는 위로의 어루만짐으로 다가섰다.

산문인(散文人)으로서 법정 스님은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우리 출판계 역사에도 기록될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남겼다. 이런 숨은 힘은 산문집 ‘무소유’의 모습으로 꽃을 피운다. ‘무소유’는 1976년 4월 출간된 뒤 34년간 약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다. 이 외에도 30여 종의 저서를 남겼는데 ‘무소유’를 비롯한 인세 총 수입은 10억 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각 출판사에서는 이들 인세가 그동안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다만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장학금 등으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그것은 평소 기부 내역을 일체 외부에 알리지 않았던 법정 스님의 철저한 기부철학 때문이다.

‘사리를 찾지도, 탑을 세우지도 말라.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법정 스님은 2010년 우리 곁을 떠났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가진 것을 모두 베풀며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그렇게 빈손으로 떠났다.

<김부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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