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의 실종
신호등의 실종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3.04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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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상에는 신호등이 많다. 이 신호등의 사이클(Cycle)에 따라 자동차가 움직이고 사람들이 오고 간다.

이렇게 흔한 신호등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작심하니 문득 스치는 기억이 있다. 필자가 공직생활 때 흰 색에 금테를 한 모자를 쓰고 순찰차로 도로를 누비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때에 신호등은 그냥 교통질서 유지 수단으로만 생각되었다.

게으른 자가 황혼에 바쁘다고 했던가? 뒤늦게 신호등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았다. 질서는 정의다. 정의로워야 할 도로에서 정의롭지 못한 사고가 다반사로 발생하고 있으니 이름하여 신호위반이란 가증(?)스런 행태는 신호등의 실종이다. 신호등은 우리에게도 정의를 요구한다. 잘 지키라는 것인데, 성남?옥교 원도심의 일방통행로는 노폭이 좁으니 보행자는 곳곳의 빨간 신호등에서 1초 뛰기 선수가 된다. 자동차도 분명 정지신호인데도 슬금슬금 통과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제까지는 도로상의 현상들이고, 두뇌 사이클에 따라 움직이는 마음속의 신호, 십리 대밭을 예로 들어 본다. 십리대밭교(橋)와 대밭길 시작과 끝 지점에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자전거 탑승을 금하는 플래카드가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는데도 본척만척하며 아이, 어른 다함께 짝짜꿍으로 타고 간다.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니 이건 의식 밖에서 착각하는 두뇌 사이클의 역회전으로 역시 신호등의 실종이다.

우리 마음속의 신호등은 의(義)다. 사람들은 모두가 의로운 사회에 살기를 원한다. 의로운 사회를 원하면 나부터 의로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 철학자 <플라톤>은 “저마다 제 직분을 지키고 남을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것”이라고 의를 해석했다.

사람은 저마다 제가 서 있는 자리가 있고 제가 맡은 직분이 있다. 제자리에서 직분을 다하고 남의 직분을 건드리지 않을 때 신뢰의 의(義)가 실현된다고 <플라톤>은 믿었다.

이 모든 충돌하는 사회적 직분 중에 만일 의에 반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분명 불의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의로운 자로서 신(神)앞에 서고, 자연 앞에 서고 또 진리 앞에 서야 한다.

국민은 언제나 의로운 밝은 사회를 원한다. 이 밝음이 빨간 불로 고장이 나 있다면 빨리 머리를 맞대고 수리해야 한다. 국민은 하루 속히 신호등이 정상 사이클로 돌아가길 원한다. 신호등의 사이클을 제대로 아는 지도자가 절실하다.

신호등이 없던 옛날의 고전에 신호등의 사이클을 딱 지적한 글이 있다. 중국 옛 시인 <소동파>가 그의 스승에게 보낸 ‘답사 민사서(答謝民師書)’에 있는 말이다.

“常行於所當行, 常止於所不可不止”(상행어 소당행, 상지어 소불가부지). 상(常)은 늘, 또는 변함없다는 뜻이다. 행(行)은 가다, 또는 행하다의 뜻이다. 어(於)는 장소를 가리키는 전치사에 해당한다. 소(所)는 특수한 지시대명사로서 동사 앞에 놓여 사람이나 사물 또는 장소를 가리키는 명사를 구성한다. 따라서 소당행(所當行)은 응당 가야 할 곳이라는 뜻이 된다.

지(止)는 정지(停止)하다 또는 그치다의 뜻이 되고 불가(不可)는 금지나 불가능을 나타낸다. 따라서 소불가부지(所不可不止)는 멈추지 않으면 안 될 곳이라는 뜻이다. 이를 이해해 보면 “언제나 가야할 곳을 가고, 언제나 멈추지 않으면 안 될 곳에서 멈춘다”라는 뜻이 된다. 이 얼마나 사람이 지켜야 할 신호등의 기초를 정확히 집어낸 말인가.

늘 가야할 곳을 가고, 멈추어야 할 곳에서 멈춘다면 그것이 정의의 길이고 최고의 경지다. 지도자나 국민 모두가 이 말을 새기고 또 새긴다면 신호를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우(愚)는 결코 범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굳게 믿어 본다.

<이영조 중구보훈안보단체협의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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