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
똘레랑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2.22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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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 화합과 소통은 없고 서로 자기주장만 내세우며,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보수와 진보로 대표되는 여야의 정치적 대립이나 정규직·비정규직 문제에서 나타나는 소득분배 불균형에 대한 저항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대립하고 서로의 정당성만을 주장하면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관용의 정신’이 아닐까?

관용(寬容)이란 ‘남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을 뜻한다. 관용은 프랑스어로 ‘똘레랑스’(tolerantia)라고 하는데 ‘tolerance’와 같은 의미이다. 동사 형태의 ‘tolerate’는 ‘용인하다’ 또는 ‘불쾌한 일은 참고 견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관용이란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가나 용서함을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을 공학적으로 사용할 때는 ‘허용오차’라는 용어로 사용된다. 가령 지름 50㎜의 둥근 봉을 만들려고 할 때 이 치수로 정확하게 가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50±1㎜와 같은 치수를 준다면 49~51㎜ 사이에 있는 치수는 합격이 되므로 가공하기가 훨씬 쉬어진다. 이 때 ±1이 똘레랑스가 되는 것이다. 똘레랑스는 가능 영역을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그것 아니면 안 된다’라는 것이 아니고 ‘조금 부족하거나 과하더라도 문제없다’라는 것이다. 똘레랑스가 커질수록 마찰과 대립이 줄어든다. 서로 이해하고 용인하는 삶의 방식이 되는 것이다.

똘레랑스란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말한다. 프랑스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나에게) 존중하게 하시오’ 라는 사회적 통념이 암묵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면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성경말씀도 똘레랑스를 강조한 말이라 할 수 있다.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는 밝고 환하며 웃음이 넘친다. 서로 대립할 일이 줄어들고 상대방을 인정하는 쌍방향 소통의 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관용이란 힘과 권력이 있는 자들이 가지는 향유물-정신적 사치물인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을 이룩했던 로마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수많은 요인들이 있었겠으나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개방성과 관용을 통한 포용성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로마는 정복한 나라들의 문화와 언어, 관습을 용인하는 정책을 통해 수많은 정복민족들을 로마인의 정신 속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팍스로마나’(Pax Romana) 시대가 형성되어 200여년의 평화시대가 도래한다. 팍스로마나는 원래 ‘로마 지배 아래의 평화’란 뜻으로 정치적 힘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논리라고도 볼 수 있겠으나 로마인의 개방성과 포용성을 통한 당시의 세계화 전략의 산물임을 부인할 수 없다.

관용의 힘은 참으로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관용은 논리에 우선한다. 아니 애당초 관용이란 논리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인간애의 발로이다.

유엔 창설 50주년이자 마하트마 간디 탄생 125주년이었던 1995년을 맞아 유네스코가 ‘관용을 위한 국제연합의 해’와 함께 매년 11월 16일을 ‘국제관용의 날’로 제정하였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의미의 ‘관용’, ‘똘레랑스’가 이 시대에 그만큼 중요하기에 특별한 날로 제정까지 하여 지키게 된 것이다.

관용은 타인에 대한 나의 인격적 태도이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관용이란 무엇을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욕심내지 않고 나누어 공유하는 지혜를 말한다.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는 정녕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의 사회이다.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며, 경쟁보다는 협력이 앞세워지는 사회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유토피아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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