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기도
어머니의 기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2.22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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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 뛰어놀던 고향은 부산 아미동 골짜기였다.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이 되었던 창선동, 토성동 근처 동네였다. 그 동네에서 7살까지 살았고 그 때 특히 친하게 지내던 친구로 남자애 하나와 여자애 하나가 있었다.

다섯 살짜리 꼬마 셋은 눈만 뜨면 만나서 하루 종일 같이 놀았다. 소꿉장난도 하고 야쿠르트아줌마의 배달가방을 천연덕스럽게 열어 몰래 꺼내먹기도 하였다. 이따금 자갈치시장 리어카의 나무상자에서 생선을 끄집어내 집으로 가져올 때도 있었다. 우리 딴에는 몰래 가져오는 거라고 믿었지만 어른들의 눈에는 더 이상 비밀이란 게 없었다. 땅꼬마 셋이서 꽁치 한 마리씩 들고 줄지어 내빼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한 모양이었다. 뒤로 값을 치르고 나서는 따끔하게 혼을 내주시기도 했다.

우리는 종종 창선동 용두산공원에도 놀러갔다. 어른걸음으로도 그리 가깝지 않은 거리이지만 꼬마아이 셋은 잘도 활보를 하고 다녔다.

하지만 때로는 집으로 돌아오다 길을 잃는 일도 있었다. 동네어른들은 그럴 때마다 용두산공원 아래 창선파출소로 달려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었다. 참 희한한 건 내가 여자애만 챙겼지 남자애는 생각조차 못한 일이었다. 길을 잃고 우는 애는 주로 그 남자애였다. 간혹 그 여자애와 나 둘이서 길을 잃을 때도 있었지만. 하여간 미안했다 친구~^^!

그 남자애 집은 참 부자였다. 셋이서 늘 그 집에서 놀곤 했는데 어릴 적 기억에도 그 집에는 없는 게 별로 없었다. 처음 보는 장난감들, 처음 맛보는 과자들…. 골목 중앙을 크게 차지한 남자애의 이층집은 정말 꿈의 놀이터였다. 그리고 그 남자애는 자랑을 대놓고 많이 하곤 하였다. 자기 집에는 똑같은 게 여럿 있다는 자랑이었다. 장난감도 같은 게 여러 개 있고, 과자도 많이 있고, 엄마도 둘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엄마가 둘이라니? 지금 그 말을 들으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놀랐겠지만 철이 없던 나는 엄마가 둘이라는 그 말도 마냥 부럽기만 하였다. 1970년대, 그리 풍요롭지 않던 그 당시에 많다는 것은 무조건 좋았으니 말이다.

여자애 아버지는 배를 탄다고 하였다. 그 애 엄마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고, 늘 흰색 레이스가 달린 짙은 비로드 천의 원피스를 단정히 입고 있었다. 여자애 집에는 조그만 풍금이 있었고 거실 한 모퉁이에는 늘 촛불이 켜져 있었다. 내어주신 과자나 과일의 모양새는 참 예뻤고, 너무 편안함을 느껴서인지 몇 번이나 낮잠을 자다가 온 일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밥을 먹고 남자애 집에 놀러갔는데 집 앞이 난리였다. 웬 아주머니 두 분이 서로 머리채를 쥐고 흔들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그 애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에게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린 채 연신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내 친구 남자애는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울고 있었다. 많다는 것이 좋지 않을 때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냥 말없이 발걸음을 돌려야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날이 완전히 밝기도 전의 이른 아침이었다. 아침도 먹기 전이었는데 갑자기 같이 놀고 싶은 생각에 그 여자애 집으로 갔다. 여자애 집은 이층 양옥 위의 세든 집이어서 계단을 지나야 들어갈 수 있었다. 계단을 거쳐 이층 마당으로 걸어갔는데 거실 문 유리창 너머로 그 여자애의 엄마가 보였다. 흰색 레이스가 달린 짙은 회색 원피스를 입고 촛불 앞의 성모 마리아상을 향해 기도하고 있었고, 여자애는 어머니의 무릎에서 편안하게 잠이 들어 있었다. 어린 나에게도 그 모습이 어찌나 평온하고 경건하게 보였던지 나는 한참을 말도 못하고 지켜보기만 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어린 마음에도 그 평온을 깨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그리고 얼마 후 그 남자애는 이사를 가버렸다. 들리는 말로는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서 야반도주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 우리 가족도 꿈에 그리던 집을 사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꼬마 삼총사는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유년의 기억을 간직한 채 헤어지게 된 것이었다.

재미난 것은 언제나 기억은 같아도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은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나의 머릿속에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싸우던 그 남자애 두 엄마의 모습과 이른 아침 성스러운 기도를 드리던 그 여자애 엄마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번갈아 스쳐 지나간다.

이제 팔순이 다 되어 허리가 불편하신 우리 어머니는 오늘 새벽에도 절에 가서 또 불공을 드리고 계실지 모른다. 후회하지 않게 안부전화라도 자주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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