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 쿠바노
쿠바 & 쿠바노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2.22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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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기간에 반가운 소식 하나가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미수교국인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지난 12일부터 열리고 있는 ‘2015 아바나 국제도서전’에서 ‘문학 한류’가 쿠바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는 소식이었다.

연합뉴스 기자는 현지에서 띄운 기사에서 “한국과 쿠바는 1959년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 이후 교류가 끊긴 상태지만 한류는 이미 쿠바에 스며들고 있다”고 전했다. 또 ‘내조의 여왕’ ‘드림하이’ 같은 한국 드라마 여러 편이 전파를 탔고, ‘꽃보다 남자’를 재미있게 봤다는 젊은 여성들이 의외로 많았으며, 쿠바 정부의 한 당국자가 자신의 아내가 한국 드라마의 열성 팬이라고 귀띔했다는 뒷얘기도 곁들였다.

우리네 대부분이 비슷한 처지이겠지만, 필자는 그동안 쿠바 공화국(Republic of Cuba)에 대해 너무 무지했었노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방인 미국과 국교를 단절한 ‘적성(赤星)국가’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쿠바를 거들떠보지 않았고 애써 눈감아 온 것이 사실이다. 고작 안다는 것이 ‘노인과 바다’의 작가 헤밍웨이가 남다른 애정을 쏟은 나라, 피델 카스트로가 1959년 1월 사회주의 정권을 세운 나라, 최근에는 권력을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물려준 나라, 그리고 1962년 10월에 ‘미사일 위기’가 닥쳤던 나라, 악명 높은 관타나모 수용소 터(해군기지)를 미국에게 빌려준 나라다. 굳이 더 보태자면 ‘쿠바 시가’와 ‘살사 댄스’로 유명한 나라, 세계야구대회에서 우승한 한국 팀을 피델 카스트로가 격찬한 야구의 나라 정도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쿠바와 우리나라의 인연은 결코 가볍지가 않다. 두 나라의 관계는 일제강점기인 1921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1921년이라면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용설란의 일종, 일명 ‘애니깽’) 농장에서 죽자고 고생하던 한국의 노동이민자 300여 명이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주하던 해다. 한국인들은 쿠바에서도 중노동에 시달렸지만 조국의 독립을 향한 일념은 노예노동의 대가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흔쾌히 바치는 조국애로 승화되기도 했다. 두 나라의 본격적인 교류는 8·15 광복과 더불어 시작됐고, 6·25전쟁 때는 쿠바가 경제 원조의 손길을 내밀었다.

쿠바가 개방의 빗장을 연 것은 1990년대, 옛 소련의 붕괴 시기와 맥을 같이한다. 이후 최근까지 우리나라의 관광객과 수출기업들은 조금씩 쿠바를 오가며 교류의 끈을 이어오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미국 정부의 햇볕정책이 급격한 변화의 싹을 틔우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유를 받아들인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53년 만의 국교 정상화를 전격 선언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남아메리카 대륙 사이에 자리 잡아 ‘아메리카 대륙의 열쇠’, 대서양과 카리브 바다와 맞닿아 ‘카리브 해의 진주’로도 불리는 쿠바가 우리들 곁으로 친근하게 다가올 날도 멀지않은 것 같다. 식민 지배를 받았고 공동체의식을 중시하는 점에서 우리 코레아노(coreano)들과 유사성이 적지 않은 쿠바노(cubano)들.

2009년판 안내서 ‘쿠바에서 보물찾기’는 그들을 이렇게 묘사한다. “쿠바인들은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도록 가르친다. 그래서 그들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보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최선을 다해 도와주려고 한다.”

차제에 울산시 당국이 시야를 쿠바, 그리고 이 나라의 항구 산업도시 쪽으로 돌렸으면 하는 기대감이 있다. 머지않아 닥칠 한국-쿠바의 수교를 염두에 두고 친선 교류의 물꼬를 국내 다른 도시보다 먼저 틀 수 있도록 ‘가까운 훗날’에 미리 대비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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