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것
‘본다’는 것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2.01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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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보고 걸어오는 사람에게 언제 눈인사를 해야 할지 망설이는 경험을 한 경우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눈을 마주친다는 것은 내 공간에 타인이 들어섰다는 말과 같다. 사람의 신체와 행동의 크기는 타인과의 간격이 얼마인가에 따라 일어난다. 타인의 시선을 피해 개인적인 공간을 필요로 한다. 타인과 적당한 거리는 일 미터에 불과하다. 이내이면 불안을, 밖이면 거리감을 느낀다고 한다.

‘본다’라는 행위는 망막을 통해 들어오는 시각적인 정보를 넘어서서 그 사건에 대한 가늠자가 생겼다는 말이다. 세상을 보는 다양한 잣대를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지식이나 가치관 혹은 경험이나 문화적 환경도 한 몫 하지만 그 어떤 무엇보다 선행되는 일은 무언가를 보는 일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사람이나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우는 일은 한 해가 지나면 나이를 먹는 일처럼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과정에서 염치와 도덕이 생기고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가 생겼을 것이다.

세상은 뉴스로 넘쳐난다. 살아있다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불행한 일을 당한 이름 모를 이에게 위로를 건네고 나라를 대표해서 열심히 뛴 운동선수들을 응원하고 나랏일을 시작하는 정치인에게 세간보다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며 질타를 보내기도 한다. 이 모든 일의 첫 번째 단계는 ‘본다’라는 행위에서 출발한다.

연이어 나오는 뉴스의 초점은 폐쇄회로 TV(CCTV)이다. 어린이집에서 일어난 참혹한 구타사건부터 크림빵 뺑소니 사건까지 CCTV가 잡은 화면은 사건해결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그만큼 영상은 힘이 세고 강력하다. CCTV의 설치와 운영은 순기능과 역기능의 경계를 넘나들다보니 사건이 터질 때마다 서로의 의견이 분분하니 이번에도 그 결과는 지켜볼 일이다. 요즘 우리네 세상은 하나같이 휴먼 스케일을 뛰어넘는 거대한 공간이다. 고층 아파트에 살면서 대형 쇼핑몰에서 물건을 고르고, 마천루로 출퇴근을 하고, 수천 명을 실어 나르는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공간이 넓어질수록 내 눈이 닿는 곳은 줄어든다.

더불어 타인의 시선에 대해 무감각해진다. 모르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나를 지켜보는 것은 다름 아닌 CCTV이다. 단 한순간도 한 눈 팔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 목적을 명시하지도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카메라는 공간의 목격자가 되어 끊임없이 기록하고 저장한다. 차량에 부착하고 다니는 블랙박스는 달리는 목격자가 되어 사건을 해결하기도 하지만 각자의 입장을 무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기계의 눈이 인간의 눈을 대신하는 세상이 살만한 것인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왠지 녹화된 영상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 해결이 되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씁쓸해지고 골목길이 많던 옛 동네가 그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내 눈길이 닿지 않는 데가 없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언제든 다녀올 이웃집이 가깝고, 어른들의 눈길과 어린아이들의 시선이 수줍게 마주치던 곳이었던 동네는 찾기 힘든 공간이 되었고 어느덧 나들이 공간이 되어버렸다.

오늘도 텔레비전에서는 영상이 쏟아진다. 자료화면이라는 미명하에 언제 어디서 찍었는지도 모르는 영상들이 가득하게 펼쳐진다. 기계의 눈이 포착한 영상을 보다 지쳐 텔레비전 전원을 끈다.

잠시 감았던 눈을 뜬다. 자연스레 창문으로 눈길을 돌린다. 건물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산자락의 나무가 눈에 띤다. 햇살이 어느새 봄을 품은 것처럼 밝게 보인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박기눙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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