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꾼에 밟히고 민원에 치여 ‘빈사’
장사꾼에 밟히고 민원에 치여 ‘빈사’
  • 권승혁 기자
  • 승인 2008.08.03 2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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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지요”
지난 2일 자정을 조금 넘은 울산시 동구 일산해수욕장. 20여명의 동구청 단속반원은 불안한 듯 각설이패의 노랫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인근 주택가에서 “각설이패로 인해 잠을 못자겠다”며 끊임없이 민원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끄럽다는 민원이 들어와서 그런데 볼륨을 조금만 낮춰주세요. 12시가 넘으면 줄이기로 했는데…” 단속반이 도리어 사정한다. 뒤돌아서면 말짱 도루묵이다.

일산해수욕장 주변은 무더위를 피해 나온 시민들로 연일 북새통을 이룬다.

지난달 4일 개장 이후 지금까지 다녀간 인파는 16만명을 넘어선다. 평일에는 4천여명, 주말에는 1만여명이 해변으로 몰린다.

피서객들의 주머니를 노린 각설이패도 올해 들어 부쩍 성행한다. 작년 1곳에 불과하던 각설이패 영업장은 올해 모두 7곳으로 늘어난 상태다. ‘팔도각설이, 원조팔도 각설이, 각설이 노래마당, 나금비 각설이…’ 등 이름도 다양하다.

얼굴에는 연지 곤지를 찍은 우스꽝스런 모습의 여장 남자들이 곳곳에서 노랫가락을 뽑아낸다. 농도 짙은 야한 농담을 줄줄이 쏟아내면 피서객의 입과 주머니는 즐거운 듯 연신 벌어진다.

단속반원을 지켜보던 안모(여·38·전하동)씨는 “저 사람들도 참 못 할 짓이다”며 안쓰러워한다.

동구청 단속반원이 찾아가면 각설이패의 걸쭉한 입담에 놀림만 당하기 십상이다. 한철 장사에 목을 매는 이들을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다. 구경꾼들조차 “사람들이 즐거워하는데 그냥 놔두라”며 말린다.

그래도 민원을 무시할 순 없다. 고사리 손에 들린 폭죽 소리도 시끄럽다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 고심 끝에 짜낸 대안이 각설이패와 밤 10시, 그리고 자정을 기점으로 해 음향을 점점 줄이기로 합의(?)한 것이다. 물론 지켜지지 않는다.

한 단속반원은 “새정부 들어 공무원의 위상이 크게 떨어져서 그런지 단속을 나와도 신경도 안 쓴다”고 말한다.

공무원 생활 30년을 넘어선 한 단속반원은 연일 새벽단속에 투입되자 “생체주기가 바뀐 탓인지 체중이 3kg 줄었다”며 “낮에 밀려드는 졸음을 참기 힘들다”고 한다. 여직원들은 새벽 3시가 다 돼 집으로 들어가면 파김치가 된 몸으로 남편 눈치도 봐야 한다.

그나마 지금은 상황이 조금 나은 편이다. 불법 노점상들을 철거할 때는 온갖 욕설을 다 듣는다. 휴가까지 반납한 한 직원은 얼마 전 주전 해변가 불법 텐트를 철거하다 팔 등을 맞아 전치 3주의 부상을 입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맞대거리를 할 수도 없다. 백번의 미소 끝에 한 번의 화냄이 전부로 비춰진다. 해변가 공무원의 비애다.

공직 생활 20년을 넘긴 한 직원은 “진짜 요즘 들어 공직에 환멸을 느낀다”고 한다. “그래도 즐거운 마음으로 일 하려고 다들 애쓴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휴가 때 어디 갈 계획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여직원은 “해변으로는 절대 가지 않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 권승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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