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예찬
희망예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1.11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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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라는 말을 가만히 떠올리면 순간 머릿속이 환해오는 느낌이 든다. 특별한 개인적 바람이 없을지라도 희망이라는 평범한 단어는 묘한 여운을 남긴다. 마음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꿈틀대던 희망이란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묘하게도 마지막 한 글자를 완성하는 입모양은 마치 겨우내 힘을 모은 꽃잎이 한잎 두잎 벙글 듯 붙었던 위아래 입술이 가만히 열리고서야 한 단어가 완성된다. 그리곤 아주 잠깐 동안 꽃 속을 들여다보듯 숨을 멈춘다.

누구에게나 막연하나마 한가지씩의 희망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가능성이 있든 없든 마음에 품게 되는 희망은 꿈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희망은 목표와는 다르다. 목표는 대개 분명한 시기나 기간을 두고 인생의 긴 시간으로 봤을 때는 단기적이다. 그 과정 또한 치열하다. 그리고 그 목표는 꼭 풀어야하는 인생의 숙제와 같아서 우리 삶을 거칠고 팍팍하게도 만들기도 한다. 어떤 경우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면 극도의 좌절감으로 삶의 종결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희망은 연약한 듯 막연한 듯하지만 마음에서 결코 쉽게 놓지 않는다. 삶이 힘들 땐 잠시 내려놓기도 하지만 아주 자취를 감추는 건 아니다. 늘 마음 한켠에 주위를 비추는 촛불처럼 우리를 꿈꾸게 하고 현실 속 또 하나의 자신과 서로 가슴을 맞대고 현재를 살게 한다.

작은 희망 한 가지라도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인간의 생물학적 면에서는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사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의 결심을 하고 이런 저런 목표를 세우지만 대개는 작심삼일의 허탈감에 빠진다. 물론 목표가 우리 자신을 채찍질하여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도 한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삶에 스스로 만족할만하여 행복하다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무리한 목표나 허황한 이상에 우리는 좌절하고 피폐해져서 스스로 초라한 자학의 도가니로 빠져들게도 된다. 결국은 매스컴을 통해 많이 보고 듣게 되는 개인이나 가족의 불행하고 비극적인 결말이 그것이다.

새해 들어 처음 읽게 된 책이 빅터. E.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였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와 다하우 등지의 강제수용소에서 3년을 보내고 석방된 한 남자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자신이 체험한 고통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로고테라피’라는 정신분석학이론이다. 그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겪게 되는 인간의 정신적 반응에 대해 심리학자로서 자신의 체험을 학설을 곁들인 고백으로 남겼지만 나는 책을 읽으면서 결국 사지에서 궁극적으로 자신을 지탱해준 그 무엇은 ‘살 수 있다’는 희망과 ‘살아남겠다’는 실낱같은 의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몇 년 전 폴란드여행에서 본 아우슈비츠수용소의 전경은 살벌하고 끔찍했다. 수용자들을 실어 나르던 긴 철롯길과 끝없이 넓은 들판 가운데 서있던 붉은 벽돌건물의 소름끼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속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은 그를 기어이 그가 원하던 자유와 안락하고 따뜻한 고향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결코 목표 때문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현실적으로 뚜렷한 가능성이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희망의 사전적 의미는 ‘앞일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가지고 바람. 또는 앞으로 잘될 가능성’ 이다. 아직은 겨울 속이지만 벌써 봄을 생각한다. 잘될 가능성에 뿌리를 돋우고 새봄엔 한 송이 작은 꽃이라도 피워보면 어떨까.

이정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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