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즈음에
다시 이즈음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12.28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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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한 해의 막바지다. 이즈음이면 여러 가지 상념들이 생긴다. 시간과 기억에 대한 생각도 그중의 하나다. 기억은 시간의 틈을 비집고 쌓였다가 사라진다.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이라는 단위로 잘라낸 시간을 무사히 보냈다는 안도감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의미를 찾아 흐릿한 기억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다사다난했다’는 묵은 표현은 해마다 유효하다.

천만 관객을 모았다는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도 시간은 아버지와 딸을 잇는 중요한 연결 고리로 작용한다. 중력을 거스르는 또 다른 우주 공간을 표현한 장면도 좋았지만 나는 아버지와 딸의 시간을 보여주는 장면이 더 인상적이었다. 영화는 켜켜이 쌓인 그들의 추억들을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히 엮은 공간으로 시각화해서 보여준다. 그들의 시간의 편린은 기억이고 추억이었다. 영화의 설정처럼 내 곁에도 어떤 일의 징조를 나타내고자 애쓰는 누군가가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저절로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어릴 적 나는 지독히도 엄마를 따라다녔다. 시작점과 까닭은 잊었지만 끈질기게 엄마의 뒤를 놓지 않았다는 기억만은 뚜렷하다. 동네에서도 자자했던 나의 행동은 어린 시절을 들먹일 때 마다 꼭 등장하는 이야깃거리였다. 기억은 그렇게 재생산되고 또 잊힌다. 고향의 의미도 그중의 하나다.

디아스포라가 되어 떠도는 이들이 많아서일까, 고향의 의미는 넓어지고 다양해졌다. 때로 부작용으로 작용하기도 할 만큼 말이다. 사람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엄마를 따라다녔던 곳을 이야기한다. 연락이 닿는 친구가 살지도, 지금의 나와 별 상관도 없는 곳임에도 뉴스나 소식을 들으면 왠지 반갑고 관심이 간다. 노년을 지내고 싶은 곳으로 꼽기도 한다. 한편으로 고향은 떠나야 제 맛은 아닌지, 되돌아가도 별 감흥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고향 하면 그곳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왜 고향을 묻고 대답할까. 왜 고향 사람을 만나면 떠들썩해지는가. 어렴풋한 추억과 기억밖에 없는 공간을 나는 왜 고향이라 여길까. 그렇다면 훨씬 많은 추억과 세월이 쌓인 동네는 내게 무엇일까. 고향과 똑같은 해넘이를 한, 평생 할 일을 얻은 곳을 나는 왜 고향이라 여기지 않을까.

그것은 아마 고향은 지리적 공간을 뛰어넘어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아 여물고 자란 덕일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처음 대면한 순간이 담긴 곳, 내 아버지의 땀방울이 섞인 곳을 잊지 않으려는 애씀이리라. 또한, 익숙하고 소중한 이들을 잊지 않으려는 몸부림 혹은 언젠가 닥칠 떠남과 이산을 지우는, 상처를 덮는 딱지 같은 것이리라. 시간을 거스르는 유일한 통로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축을 따라 움직이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끝없는 이산과 떠돎을 반복한다. 내가 이 자리에 도달했다는 건 어딘가에서 이곳을 향해 출발한 거라 읊은 어느 시인처럼 우리는 수없이 고향을, 터전을 떠날 수밖에 없다. 현실 속에서 고향은 이미 이별의 아이콘이다. 그리움의 또 다른 이름이다. 떠난 적이 없는 자에게 애달픈 향수는 없다. 그러니 떠나고 볼 일이다. 그곳이 어디든, 누구를 만나든, 어떤 상황을 마주치든 기꺼이 받아들일 마음만 갖고 떠나라. 여정이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어깨동무를 해도 좋으리라. 가슴을 내밀고 발을 힘차게 딛어라. 그곳에서 시간은 천천히, 당신이 원하는 속도로 흐를지도 모른다.

<박기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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