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甲午年) 단상
갑오년(甲午年) 단상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12.2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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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甲午年). 갑오년은 우리 근대사에 깊이 각인된 해였다. 120년 전인 1894년이 바로 그 격동의 해였다.

동학농민봉기는 그 해 한 해를 오롯이 불태웠다. 그래서 갑오농민운동 또는 갑오농민전쟁이라 부른다. 만석보를 터뜨리고 고부관아를 점령한 1차 봉기는 그 해 음력 정월 10일에 발발했다. 정월대보름 명절을 앞둔 장날이었다. 한해 농사를 시작하는 대보름은 다가왔는데 양식은 그때부터 부족했다. 말목장터에 모인 농민군은 그 분노를 고부관아에서 분출시켰다.

그렇게 불붙은 동학농민전쟁은 동짓달에 우금치 전투에서 패퇴하면서 막을 내렸다.

조정은 한편으로 갑오경장, 을미개혁 등을 단행하며 국면전환을 도모했다. 이듬해인 을미년에는 구중궁궐의 왕비가 시해되는 참사가 발생한다. 을미사변이다.

조선과 그 뒤를 이은 대한제국은 을미사변 15년 후인 1910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국왕 또는 황제의 권위는 을미사변 때 이미 그 생명력을 다했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굳게 정립한 조선에서 관혼상제의 예법은 국기(國紀)였다. 하지만 당시 왕실은 비명횡사한 왕비의 장례를 제 때 치르지도 못했다. 장례는 시해 2년후인 1897년 11월에야 치를 수 있었다.

아관파천을 단행했던 고종은 덕수궁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했다. 민비는 명성왕후로 추존됐다. 그리고서야 장례를 치렀던 것이다. 고종으로서는 때늦은 장례의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만회할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17세기 조선 사회에서는 대비의 복상문제로 예송(禮訟)논쟁이 두 차례나 치열하게 벌어졌다. 서인과 남인의 대립을 격화시켰던 예송논쟁은 조선사회에서 예학과 관혼상제가 얼마나 중요한 의제였는지를 극명하게 대변한다.

그런 조선에서 2년 동안이나 장례를 치르지 못 한 것은 시해를 당한 것만큼이나 뼈아픈 일이었다. 왕실은 땅에 떨어진 권위의 민낯을 가릴 수 없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과 덕수궁으로 옮겨 다니면서 시해당한 왕비의 장례를 미루는 와중에도 아들을 낳았다. 훗날 의민태자에 책봉돼 순종의 왕통을 이어 받은 영친왕은 1897년 10월 20일생이다.

영친왕의 모후는 순헌황귀비 엄씨이다. 엄 귀비는 원래 민비의 시위상궁이었다. 그러나 고종의 승은을 입은 것이 민비에게 발각돼 궁궐에서 쫓겨났다.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고종은 엄 상궁을 다시 궁으로 부른다. 아관파천을 성사시키는데 엄 상궁의 기지가 크게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고종은 명성황후 장례 이후 22년을 더 살았다. 그러나 고종은 계비를 맞지 않았다. 이 또한 왕실에서는 이례적인 경우다.

황후로 간택된 여인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황후로 책봉되지 못하고 수절해야 했다. 1915년이 돼서야 입궐할 수 있었지만 ‘정화당 김씨’로 불리며 궁궐의 구석진 방에서만 지내야 했다. 고종이 승하할 때까지 용안을 볼 수도 없었다. 그런 정화당 김씨에게도 고종의 빈소에서 곡하는 것은 허락됐다. 그녀는 생전에 일면식도 없었던 지아비의 영전에서 통곡했다. 주위의 아무도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고 전한다. 조선왕조는 그렇게 스러졌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이토오 히로부미가 숨지자 대한제국 융희제(순종)는 이토오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諡號)를 내리며 조문사절을 보냈다. 융희제는 명성황후의 아들이다.

<강귀일 취재1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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