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또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또 아버지와 아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12.0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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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처럼 돌아가신 아버지도 경찰관이었다. 아버지는 늘 아침 일찍 출근하시고 밤늦게 퇴근하셨다. 그리고 종종 집으로 비상을 알리는 전화라도 걸려오면 어김없이 새벽을 뚫고 출근하시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적어도 경찰공무원만은 되지 않겠노라 마음먹곤 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항상 바쁘고 나는 사춘기 시절 대학 입시준비로 두 사람이 공유할 추억을 그리 많이 쌓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추억이 나름 없지는 않다. 내가 초등학교 때 아버지와 목욕탕을 종종 갔었다. 뜨거운 탕 안에서 손가락 살이 쪼글쪼글할 때까지 몸을 불려 나오면 아버지는 등이 빨개져라 때를 밀어주셨다. 아직도 겨울철 저녁 무렵 기억이 가장 생생하다. 그렇게 목욕탕을 나서면 가뜩이나 노곤한데, 잠깐 찬바람을 쐬다가 다시 동네구멍가게의 연탄난로 옆에 앉으면, 그 아늑함이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병 우유를 마시는 기분이란 지금도 표현 할 길이 없다. 가게 한 쪽 연탄난로 옆에 앉아 뜨거운 어묵국물을 마시고 따끈하게 삶아놓은 계란을 까서 소금에 찍어 먹는 맛이 기가 찼다. 아버지는 늘 그러셨듯이 땅콩 안주에 시원한 맥주를 마시곤 하셨다.

어린 나의 눈에도 가게사람들과 호기롭게 말씀을 나누시는 아버지를 보면, 내가 그 가게에서 무엇을 아무리 많이 먹더라도 아버지만 옆에 계시면 나는 무서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아버지와의 추억은 이렇게 병우유에 삶은 계란과 어묵 정도인데 왜 30년 훌쩍 지난 지금 그 일이 생생하게 되살아 나는 걸까. 어쩌면 추억이란 아무리 사소해도 같이 있을 때 깊이 쌓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족이라는 관계로, 혹은 친구로, 직장 동료로 그 사람들이 항상 우리 주변에 같이 있을 것 같지만 사실 그 어떤 관계에서도 같이 추억을 나누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추억이라는 게 소중한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나도 그 때의 아버지처럼 경찰공무원이 되었다. 그리고 역시 늘 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한다. 급한 일로 경찰서에서 전화가 걸려오면 나도 그 옛날 아버지처럼 새벽을 뚫고 출근을 한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나가기 전에 잠든 아이의 새근거리며 자는 얼굴을 잠시 보고 나간다. 밖은 추운 겨울날이지만 따뜻한 방에서 평온하게 잘 자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 그렇게 흐뭇할 수가 또 짠할 수가 없다.

며칠 전 새벽, 집회시위 경비근무 때문에 일찍 출근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 때 아버지도 추운 겨울새벽에 출근하시면서 따뜻한 아랫목에 강아지처럼 웅크려 자고 있는 우리 남매들을 분명히 보시고 나가셨을 거라고 말이다. 아마 그때 아버지도 지금의 나처럼 흐뭇하기도 하고 괜스레 짠하기도 하셨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가슴속이 뜨겁게 뭉클해졌다. 아버지와의 기억 속에 정말 짧은 추억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나를 통해 나는 또 내 아이를 통해 서로 또 다른 추억을 나누고 있었다. 그날 나는 추억의 또 다른 면을 알게 되었다. 같은 공간과 시간에 있지 않아도 애틋한 마음 하나만으로도 추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세대를 넘어 그런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그리고 그 기억과 추억이 우리의 삶을 더 따뜻하게 만든다는 사실도 알았다. 올해도 며칠 안 남은 12월. 가족에 대한 따뜻한 추억을 갖게 해주신 아버지가 새삼 그리워진다.
 

<강윤석  울주서 형사과 경감·수필동호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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