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간호장교 강연현장을 다녀와서
탈북 간호장교 강연현장을 다녀와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12.09 20: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암호수공원을 산책하는 길에 ‘다람쥐 저금통’을 봤다. 동물보호단체와 현대자동차가 협찬해 다람쥐에게 먹이를 원활하게 공급할 수 있는 기금을 마련코자 한 것이다. 이처럼 이제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서 동물들의 생존권에까지 관심을 가질 정도가 됐다. 단순히 동식물의 성장이란 측면에서만 바라볼 게 아니라 생태계라는 큰 틀에서 그들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남북한 분단은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이며 민족적 과제다.

지난달 19일 저녁 탈북간호장교 이순실 씨를 강사로 초청한 집회에 다녀왔다. 그녀는 군인 아버지와 군단장 요리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간호장교로 11년간 군 복무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제대 후 퇴직금 40원을 받아 집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막내 동생은 행방불명된 상태였다. 그녀는 이후 구걸로 연명하며 살다가 1997년 12월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처음으로 압록강을 건너 탈북을 했지만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송된 뒤 보위부로 끌려갔다. 이후 탈북과 강제북송이 7번이나 되풀이 됐으며 그때마다 그녀는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해야 했다.

2007년 11월 딸아이를 낳은 일도 그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다리 밑에서 꽃제비 생활을 하던 중 진통이 시작됐고, 역 뒤편 보일러 재 버리는 곳에서 아이를 출산했다고 한다. 지나가던 할머니가 쓰레기통을 뒤져 찾은 유리조각으로 아이의 탯줄을 끊어줬다. 아이를 낳았지만 젖이 나오지 않아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 그녀는 2006년 또다시 탈북을 시도했고 마침내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녀는 두 살 먹은 딸아이를 잃어버리는 쓰라린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중국 한인교회의 도움을 받아 공안의 눈을 피해 몇 달간 숨어 지내며 교회의 보호를 받았다. 공안들에게 잡혀서 북한으로 끌려가 보위부에 체포되는 생각은 상상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끔찍함이었다고 그녀는 술회했다. 하루하루 산더미처럼 짓누르는 불안감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한다. 그녀는 일행들과 중국, 몽골 접경지역으로 떠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국경을 넘기 직전 8명의 일행이 모두 체포됐다. 그때 믿을 수 없는 기적이 그들 눈앞에서 일어났다. 발가벗겨진 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데 소지품에서 독약을 발견한 중국 부대원들이 “이것들이 죽을 작정을 하고 탈출 했구만. 어서 마음이 변하기 전에 떠나라”며 잠시 뒤돌아서 줬다는 것이다. 그러자 일행은 서로 눈짓을 한 뒤 죽으라고 내달렸다고 한다. 숨이 멎을 만큼 죽을힘을 다해 내달린 지 제법 지났을 때 중국 군인들이 트럭을 타고 자신들의 부대로 돌아가는 모습이 저 멀리 보였다.

그 후 그들은 황량한 몽골사막에서 식량과 물이 없어 죽기 일보직전에 구조돼 난민수용소에서 3개월을 보냈다. 그리고 지난 2007년 자유가 넘치는 대한민국 땅에 첫발을 내딛게 됐다고 한다. 한국에 정착한 뒤 그녀는 “이제야 나의 삶을 제대로 살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모 방송에서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프로그램의 리포터를 맡았고 모 채널에선 ‘이젠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 중이라고 했다. 또 한국자유총연맹 안보강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안보강사 등으로 군부대를 비롯한 안보현장에서 자유의 고귀함을 강연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강연을 끝내면서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하루 세끼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은 너무나 귀한 축복입니다. 자유가 있는 이 대한민국은 천국입니다.”

<이금희 굿뉴스 울산 발행인·언약의 교회 담임목사>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