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엄마의 병상일지
어느 엄마의 병상일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12.02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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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첫날 씨엘 요양병원을 찾았다. 3병동에서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띵’하는 소리와 함께 첫 발을 내딛자마자 TV모니터에서 눈을 돌리는 엄마와 딱 눈이 마주쳤다. 의자에서 반사적으로 일어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날 낳아주고 길러주고 오늘날 내가 있게 해준 엄마 김학필 여사다.

어느새 발치 앞에 선 엄마는 내 손을 덥석 잡아끌고 ‘어서 집에 가자’며 병실로 향한다. 마치 세상에 엄마와 나만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내 손을 잡아 이끌고 병실에 들어선다.

엄마는 치매 증세가 심해지면서 길을 못 찾고 가방의 열쇠를 끄집어내도 문에 꽂질 못해 주저앉은 채 사람오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방금 대화한 내용도 금세 까먹고 또 묻고 또 묻곤 했다. 그러면서도 새벽 3시면 일어나 씻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할 채비를 했다. 4시에 맞춰 야음파출소 앞에서 기다리면 봉고차가 교우들을 실어 나른다. 5시에 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드리면 한 시간 조금 못되는 시간에 나라와 민족, 자녀들과 친척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엄마는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그리곤 다시 봉고차를 타고와 아침을 준비하는 엄마였다. 그런 생활을 10년 가까이했기 때문에 처음 병원생활에서도 새벽에 일어나 부산하게 소란을 피웠다. 그러니 같은 병실에 있는 사람들이 짜증을 낼 수밖에 없었다.

집에 간다고 사람들 틈에 섞여 몰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가는 것을 간호사가 찾아내 다시 병상으로 모시고 온 것도 여러 번이다.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여도 요지부동, 한 번도 밥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입 안에서 음식을 씹지도 삼키지도 않았다. 침만 질질 흘려 할 수 없이 의사들이 링거를 놓아 영양을 보충시키곤 했다. 같은 병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삿대질을 하고 욕을 하기도 해 초기에는 적응시키는 데 참 애를 많이 먹었다. 이제는 병원관계자들의 보살핌과 배려 그리고 형과 누나들을 비롯한 온 가족들이 번갈아 가며 요양생활을 알뜰살뜰 도운 덕분에 거의 안정을 되찾았다. 고혈압 약의 오랜 복용과 뇌졸중 초기증세를 완화하는 아스피린과 치매 약까지 먹어가면서도 이제 병원생활에 제법 적응이 돼 간다.

김학필 여사가 펼치는 병상일지에는 자식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손자들 이름과 자택 주소와 갖가지 삐뚤삐뚤한 글씨 사이로 그리움의 숲이 울창하다. 온통 보고 싶다는 글씨로 가득하다. 말 그대로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까닭이다. 젊은 날 부두에서 하역하던 박봉의 남편 뒷바라지와 자녀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공장에서 노동일을 했던 김 여사는 진양화학, 동양 나이론을 모두 비정규직으로 다니다 퇴직한 분이다.

저녁 어스름 회사 통근버스에서 빗길 퇴근하는 엄마에게 우산을 받쳐주던 초등학교 막내아들도 이젠 중년이 됐다. 그 아들이 짤막한 편지를 보냈다. “그래 김 여사님, 2남 3녀 자녀들 등교시키랴 남편 출근에다 본인의 출근 준비까지 동시에 하면서도 얼마나 강인한 정신력으로 버텨냈길래 이제 기억조차 잊어버리는 병에 걸려들고 말았나요. 7학년 8반 우리 엄마 김학필 여사님 내년에도 어찌됐던 남은 생애 건강하고 날마다 행복하길 바랍니다” 치매에 걸려 누가 누군지 구분치 못해도 그녀는 자식들에겐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어머니임에 틀림없다.

<박정관 울산 굿뉴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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