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상을 넘어
잔상을 넘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11.30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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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병원으로 들어서는 내게 프런트에 앉은 간호사가 인사를 한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묘한 느낌이 든다. 아파서 찾아오는 환자에게 이 인사말은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물론 병원 입장에서는 수많은 병원 중에 자신들의 병원을 찾은 환자가 고맙게 느껴질 것이다. 또한 환자가 고객으로 변했으니 당연히 인사말도 ‘어서 오세요’가 옳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의료시설이 이미 아픈 곳을 치료 받고 위로받는 곳이기 보다 그저 경쟁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으로 변한 지는 오래다. 환자를 고객으로 대하는 의료기관은 그러나 인사말과는 다를 때가 많다. 엑스레이를 찍고, 피를 뽑고, 혹은 초음파 진단을 받는 따위의 각종 검사를 왜 받아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무슨 까닭으로 그런 검사를 하는지 어떤 약물이 쓰이는지 부작용의 사례는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자세하고 쉬운 설명을 듣고 싶고 묻고 싶은데 병원에는 그럴만한 인력도 의향도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저 밀려드는 환자를 빨리 순환시키는 일에 골몰하는 것처럼 보인다.

검사 결과가 모인 컴퓨터 모니터를 보면서 의사는 환자에게 몇 마디 묻고 차트에 휘갈겨 뭔가 기록을 한 후 약을 처방하고 진료를 끝낸다. 물론 대단한 병이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지만 허탈할 때가 많다. 의사와 대면하는 짧디짧은 그 순간에도 선생님이라 부르며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나이 많은 환자라도 보는 날이면 더 그렇다. 약국 제출용 처방전에 더해 환자보관용 처방전을 요구하면 그때서야 마지못해 내미는 병원도 많다. 내가 지급하는 비용만큼 양질의 서비스를 받지 못했다는 자각에 목으로 넘어가는 약이 더 씁쓰레하다.

얼마 전 유명가수가 죽었다. 이례적으로 그의 죽음엔 의료사고라는 말이 뒤따랐다. 같은 엑스레이 필름을 보면서 서로 다른 결론을 도출해내는 의사들의 인터뷰는 결코 의혹이 명쾌하게 풀리지 못할지도, 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가족의 눈물이 결코 빨리 마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짐작케 했다. 사체의 부검에 이어 해당 병원의 의료기록을 압수 수색을 하고 담당의였던 병원장을 불러 조사를 하는 중이지만 죽음의 진실이 드러날지는 의문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절차에 따라, 법에 따라, 시스템에 따라 조사가 이뤄지고 공정한 잣대로 판단이 마무리되고 매뉴얼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아직도 개인적으로 감당해야 할 몫이 너무 크다. 그의 유명세가 조금은 진상 조사에 이바지하기를, 그와 비슷한 경우를 당한 환자 가족들의 억울함도 함께 옅어지기를 빈다. 의료기록은 물론 모든 자료가 개방되기를 소망한다.

눈을 떴다 감으면 잔상이 남는다. 잔상이 계속됨으로서 우리는 사물을, 사실을 기억한다. 생존을 위해, 안위를 바라고, 무관심을 가장한 채 우리는 부당함과 불공정함을 외면한다. 바꾸기 귀찮아서 거슬리는 말을 듣기 싫고 하기 싫어서 대개의 경우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눈을 감는다. 조용해질 때까지 눈을 뜨지 않는다.

허나 계속 눈을 감고 있으면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변화를 가져오는 힘은 언제나 눈 뜬 자들의 몫이다. 그러니 우리 이제 감았던 눈을 뜨자. 눈꺼풀을 움직여 계속 잔상을 남기자. 또렷한 세상이 보일 때까지.

<박기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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