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회-11. 사랑은 언젠가 이별이다(10)
123회-11. 사랑은 언젠가 이별이다(10)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11.26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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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전하께서도 알고 계신 것처럼 태자비가 궁성내 자신의 처소에 서라벌의 젊은 종놈을 불러들여 유희를 즐기고, 그것도 모자라 밤중에 그 종자의 등에 업혀 궁성 밖에까지 나가서 말을 타고 들판을 헤매고 다녔다지 않습니까. 이미 태자비의 소생이 있긴 하지만 만일에 비(妃)가 또 아이를 생산한다면 그것을 누구의 소생이라고 말하여야 하겠사옵니까? 이 나라의 태자의 소생이라고 하여야 하겠사옵니까? 그 신라 종놈의 소생이라고 하여야 하겠사옵니까? 태자비는 그 젊은 종자들과의 음행을 실토하였으며 스스로의 입으로 서라벌의 종자와 함께 죽여 달라고 말하고 있사옵니다.”

태자비의 처형을 주장하던 필모구라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 빳빳한 시선으로 왕을 쳐다보며 뱉는 필모구라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대소 신료들은 깊숙이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신료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부왕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조차 불경스럽게 생각하여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였는데도 필모구라는 태자비를 죽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결국 그는 모반을 하다 죽었지만. 진수라니왕은 처음이 일이 일어났던 그때를 떠올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왕은 길게 숨을 토했다. 그리고 다시 표정을 가다듬어 전방을 주시했다. 잠시 흐릿하게 보이던 사물들이 다시 바른 모습으로 눈에 들어왔다.

‘군왕의 길은 이렇게 인간의 길이 아니오. 군왕의 길은 다만 나라의 길일뿐이오.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이라, 나라가 가야 하는 길이 있기 때문이오. 용서 하시오. 그리고 부디 잘 가시오. 가서 이승에 못다 한 사랑은 저승에서 마음껏 꽃피시기 바라오.’

진수라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몇 번이나 참고 참았던 눈물이 마음의 문을 열고 밀려나왔다. 진수라니는 차마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목이 메었다. 그는 눈물을 감추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보이는 마지막 사랑의 증표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눈물을 닦지 않았다.

진수라니는 마음을 다잡았다.

“시행하라!”

왕은 손을 쳐들며 명했다. 진수라니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있었으나 어조는 냉정했다.

망나니들은 오지 않았다. 집행에도 예를 갖추었다. 죄인의 옆에 명주를 깔고 집행관이 앞으로 가서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칼날이 햇빛을 받아 번쩍하는 순간 비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왕은 눈을 감았다.

왕자들의 울음소리 신료들이 흐느끼는 소리가 성벽에 부딪쳐 메아리쳤다.

비의 몸이 명주에 싸여 옮겨졌다. 비가 앉았던 그 자리는 비워지고 바람이 피 흐른 그 자리를 쓸고 갔다.

왕은 오래 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성첩 위로 노을이 서너 장 붉게 탔다. 성첩 위에 해가 서쪽에 기울어져 있었다. 오늘의 일을 지켜본 듯 노을은 여느 때보다 더 붉게 타고 있었다.

글=이충호/그림=황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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