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활 보호는 인권차원의 문제
사생활 보호는 인권차원의 문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10.21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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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전, 경남의 한 시골 중학교에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극도로 화가 난 체육교사가 한 여학생을 인계해 왔다. 내가 담임을 맡은 반 학생이었는데 운동장 체육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학교 바깥을 돌아다니다가 발각됐다고 했다. 뺨이 벌겋게 부어 오른 것으로 보아 성질 급한 체육교사에게 어지간히 맞은 모양이었다. 왜 바깥을 나갔는지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는데 그게 더 분노케 했던 모양이다.

나는 조용한 곳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 왜 나갔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몇 번을 조용조용 캐물었지만 아이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내심 좀 서운했다. 그동안 담임으로서 아이들과 격 없이 소통하고 있다고 믿어 왔는데, 적어도 내게는 이유를 말해 줄 수 있지 않은가 싶어 서운했다. 고개 숙이고 있던 아이가 서운해 하는 내 표정을 읽은 것일까. 눈물 젖은 눈으로 나를 살피더니 고개를 숙인 채 무어라 웅얼거리듯 말을 했다. 좀 더 크게. 나는 귀를 대고 채근했다. 아이는 얼굴을 파묻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갑자기… 생리가 시작돼서… 생리대 사러…” 아이는 열여섯의 소녀였고 나는 스물여섯 나이의 젊은 교사였다. 이 무슨 무례한 폭력이란 말인가. 나는 아이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한참 말없이 앉았던 내가 아이의 손을 잡고 한숨을 쉬며 미안하다고 말하자 눈물 고인 눈으로 세차게 고개를 젓던 아이의 모습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날 아이는 쉽게 날 용서했지만, 나는 교직 생활 내내 그 일을 잊지 못했다. 나는 그 후 학생의 사생활을 매섭게 캐묻지 않았다. 아니, 학생의 사생활을 다그쳐 캐물을 권리가 교사에게 있는 것인지 늘 의문을 제기해 왔다.

최근 여러 학교 교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교원 복무에 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그 논의를 보며 새삼 지난날 그 일이 떠올랐다. 모든 직장인은 사적 용무가 있을 때 연가를 쓰거나 조퇴를 한다. 교사들의 경우 방학이 있기 때문에 연가가 흔한 일은 아니지만 특별한 일이 있을 땐 연가를 내기도 한다. 교사들은 학교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미리 조정을 하고 연가나 조퇴를 신청한다. 그런데 그 때마다 관리자들이 꼭 구체적 사유 설명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국가공무원복무규정에는 “행정기관의 장이 연가 신청을 받았을 때에는 공무수행에 특별한 지장이 없는 한 허가해야 한다.”라고 명시돼 있다. 그럼에도 관리자들이 그 구체적 사유를 굳이 캐묻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전교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교조 집회 참여를 막으려는 교육부가 관리자들에게 교사들이 연가를 내는 구체적 사유를 항시적으로 확인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 관리자는 거짓 사유라도 좋으니 그럴듯한 사유를 적어 달라며 오히려 사정을 했다고 하니 우리들의 학교는 규정과 현실의 괴리 앞에서 관리자와 교사들이 서로 난감해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의 사생활을 캐물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직원들이 연가를 신청하면 관리자는 그 기관의 업무에 특별한 지장이 없는지 판단할 일이지 사생활을 캐물을 이유도 없고 그럴 권한도 없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학생의 생활과 관련해 교육을 하거나 상담을 하는 것은 교사의 의무이지만, 교사가 그것을 빌미로 학생 사생활을 낱낱이 캐물을 권한이 없다는데 동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거짓말이 일상화되는 천박한 사회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서상호 효정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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