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회-8. 사비성에 뜬 달(11)
92회-8. 사비성에 뜬 달(11)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10.14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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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아라국(함안가야) 한기의 말이 지당한 줄 아옵니다.”

아라국 한기의 말에 가라의 한기도 가세했다.

가라(대가야, 고령)의 한기는 성왕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시선을 아래쪽으로 떨어뜨렸다. 직답을 피하고 답을 뒤로 미루었지만 그것은 이미 거절의 표시나 다를 바가 없었다. 회의는 한나절을 훨씬 넘기며 진행되었지만 어떤 결론도 얻지 못했다. 회의가 끝난 분위기는 어색하고 냉랭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성왕은 자신이 소집한 회의가 어떤 결론도 얻지 못하고 끝났지만 자신의 마음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백전노장의 그 유연함과 노련함. 그 인상적인 모습이 마지막 순간까지 진수라니의 마음을 흔들었다.

성왕은 회의 어떤 결과도 얻지 못했지만 자신이 의도한 바를 이미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성왕은 처음부터 회의의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이 그 당사국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자신의 국정 방향을 상대방 국가에 제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방향 설정이 회의에서 동의 받지 못했다고 그만둘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성왕은 무령왕의 아들로 무령왕이 죽자 그해(523년) 5월에 왕위를 올랐다. 양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일본과 연대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는 백제의 전통적인 대외태세를 다시 굳게 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6년 만에 고구려의 안장왕이 침략해 왔을 때는 패하여 2000명의 군사를 잃기도 하였다.

왕은 도읍을 울진(공주)에서 부여로 옮기고, ‘남부여’라고 나라 이름을 고치는 조치를 취하였다. 백제의 부여 시대를 열어왔던 왕이었다. 일본에 불교를 전하는 등 대일관계에서도 특별한 족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즉위 이후 지금까지 거의 30년 간 왕위에 있으면서 백제의 역사를 주도해온 왕이다.

그가 일본과의 관계에 주도권을 가진 배경에는 바로 혈연관계가 얽혀 있었다. 백제 20대 비유왕(毗有王)의 아들인 곤지왕자는 개로왕 7년(461년)에 일본에 인질로 보내졌고 뒷날 일본에서 자기 세력을 구축한다. 동성왕은 아버지 곤지왕자를 따라 일본에서 성장하였고, 백부인 문주왕이 제위 2년 만에 측근들에게 살해당하고 그의 아들이 삼근왕이 13살에 왕위에 올라 그 역시 제위 2년 만에 죽자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그의 큰 아들은 백제의 왕, 즉 무령왕이 되고, 둘째 아들은 일본에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게이타이 왕이었다. 안칸(安閑)왕과 센카(宣化)왕은 다 게이타이왕의 아들이었으나 그 제위 기간이 4년과 3년으로 짧았다. 센카왕의 아들인 긴메이왕은 성왕의 종질이었다.

진수라니는 갑자기 썰렁하게 느껴지는 정전을 다시 한 번 둘러보고 문을 나서면서 성왕의 면모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성왕은 과연 소문대로 식견과 지혜가 뛰어난 인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글=이충호/그림=황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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