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덫
대화의 덫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10.07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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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성남동 젊음의 거리 앞 쪽에 있는 시내버스 정류장은 중구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다. 오후 5시경. 그 날의 공부를 마친 교복 차림의 남녀 중고등학생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삼삼오오 모여 학교에서 있었던 일, 또는 공부에 관한 내용 등으로 웃고 왁자지껄해야 할 것인데, 왜 이렇게 조용할까? 왕복 4차로를 오가는 차 소리만 시끄럽다. 이상하다싶어 둘러보니 모여 있는 그 자리에서 각자가 손바닥만 한 핸드폰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마치 단체 행동인 듯한 풍경이다. 이런 학생들의 주변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중년 남자 몇 명, 그리고 아기를 앞 쪽으로 안은 부인도 역시 한 손으로 핸드폰을 두드리고 있다. 힐끗 보니 중년 남자는 게임을 하는 것 같았고, 특히 아기가 엄마 앞가슴을 더듬는 데도 그 부인은 전현 관심 없이 열심히 두드리고 있다. 정류장의 이상한 풍경은 즐거운 대화가 없고 오직 사람과 핸드폰의 ‘1대1의 두드림’ 뿐이다.

주말 저녁때, 깨끗하고 음식이 맛있다는 어느 식당을 필자는 내자와 들어가 자리를 잡고 음식을 시키고 나니 옆자리에 손님이 왔다. 중년 부부와 중·고생인 듯 한 남매와 한 가족이 자리에 앉더니 약속이나 했는지 똑같이 핸드폰을 꺼내들고 두드리기 시작한다. 잠시 후 메뉴판을 가져오니 어머니가 처음 입을 연다. “우리 뭘 먹을까?” 아버지와 자녀들은 “아무거나?.” 짧게 합창하고 두드리는 상태만 지속이다. 시킨 음식이 상 위에 놓이자 “그만하고 먹자” 아버지의 말, 자녀들은 핸드폰을 옆에 놓고 수저를 들어 한 입 떠 넣는가 싶더니 옆에 놓인 핸드폰에 손이 간다. 먹으면서 두드리는 것이다. 이 가족에게서 대화는 없다. 핸드폰 두드리는 손동작만 있을 뿐이다.

기차역, 버스 대합실, 기차 안, 버스 안 중·고·대학생 등하교길, 가족들이 모이는 저녁시간, 각종 행사장, 사무실, 문화의 거리에서 오가면서 앞을 보지 않고 두드리니 피하지 않으면 충돌 일보전이다. 이런 풍경의 현장은 백가쟁명(百家爭鳴) 아니라 백가무명(百家無鳴)이다. 대화란 서로 마주 대하며 어떤 내용을 가지고 직접 주고받는 이야기다. 진정한 대화란 단순히 입으로 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귀로 듣는 것까지 포함한다.

인간은 대화의 존재다. 그런데 왜 우리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참다운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할까? 바로 IT기술의 부산물인 핸드폰이라는 덫에 걸려버린 것이다. 진솔한 대화의 통로인 소통을 막아버린 오늘의 현실, 울산의 현실만이 아닌 전국에, 세계로의 현실로 무섭게 중독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덫은 우리 사회 도처에 숨어 있다. 이 덫이 드러내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막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지도층에서는 서로 다른 이념의 덫으로 소통이 막혀 민생이 신음하고 있다. 대화와 소통이 막히면 오해와 대립이 세월의 덫이 되고 만다. 이 덫을 빨리 걷어내야 한다. 포기하지 않고 두 번 세 번 호소하고 설득하는 가운데 저절로 대화의 길이 열리게 된다.

마음을 움직여 문제 해결의 첩경은 대화뿐이다. 대화를 통해서만 엇갈린 감정이 조정되어 하나의 결론을 얻게 된다. 그래서 대화는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맑게 솟는 샘물과도 같다. 끊어진 대화의 현실을 회복시키는 일은 우리들의 몫이다. 손바닥 위의 작은 핸드폰, 잠시 주머니 혹은 가방에 넣고 컴퓨터는 전원을 끄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으며 대화하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그래서 “대화는 마음의 보다 즐거운 향연이다” 이 말은 기원전 그리스 시대의 시인 호메로스가 한 말이다.

<이영조 중구 보훈단체 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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