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의 공업축제
추억 속의 공업축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10.01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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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회 처용문화제가 2일 개막한다. 처용문화제는 1967년부터 열린 공업축제가 모체다. 공업축제가 1991년부터 처용문화제라는 이름으로 이어진 것이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이었지만 공업축제는 시민의 축제로서 부족함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TV도 변변히 보급되지 못했던 당시의 공업축제는 시민들에게 풍성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했던 것이다.

공업축제는 주로 6월 1일부터 열렸다. 이 날이 울산시 승격기념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해마다 이 날이 되면 공업축제 주행사장이었던 남외동 공설운동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어르신들의 모습도 보였다.

유신 시기였던 1970년대에는 공업축제에 시내 중고등학생이 전원 동원됐다. 6월 1일은 학생들이 교복을 동복에서 하복으로 갈아입는 날이었다. 산뜻한 하복 차림의 남녀학생들이 이른 아침 물결을 이루며 공설운동장으로 모여드는 광경이 축제의 서막인 셈이었다.

축제의 성화는 공업탑에서 채화했다. 여기에는 한복을 곱게 입은 여고생들이 참가했다.

축제의 꽃은 가장행렬이었다. 가장행렬에는 기업체 근로자들과 학생들이 참여했다. 기업체에서는 주로 자사 생산품을 홍보했다. 자동차 공장에서는 자동차 조립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 주는 행렬을 연출했다. 비료공장, 정유공장 등에서도 각각 생산품을 소개했다.

학생들은 헌강왕 행렬, 박제상 행렬 등을 선보였다. 가장행렬은 공설운동장에서 시계탑네거리, 태화교를 거쳐 공업탑까지 이어졌다.

행렬에는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들도 합류했다. 남학생들은 모의총을 멨고, 여학생들은 구급낭을 멨다. 학생들은 팔을 높이 흔들며 군대식 행진을 했다. 당시는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가 높이 걸렸던 때였다. 고등학생들의 취주악대, 초등학생의 고적대 그리고 농악대 등도 한 몫을 단단히 했다.

행렬이 지나는 연도에는 시민들이 나와 반겼다. 개막식에는 대규모 매스게임과 카드섹션도 등장했다. 모두 학생들의 몫이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겠지만 당시는 학생들이 이 행사를 위해 몇 달씩 연습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공설운동장에서는 씨름대회가 열렸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장사들이 참가했다. 대회진행이 순조롭지 않아서인지 결승전은 어둑해져서 열리곤 했다. 횃불을 밝힌 경기장 한 쪽에는 우승자에게 돌아갈 황소가 매여 있었다. 모두가 경기에 열중하느라 배고픈 황소를 돌볼 손이 없었는지 황소는 연신 ‘음메, 음메’하면서 울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있다. 학성공원에서는 그네타기 대회도 열렸다. 각종 전시행사와 백일장, 사생대회, 사진촬영대회 등도 축제 기간에 열렸다.

공업축제가 시민의 축제로 기억되는 것은 그 만큼 시민의 참여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 처용문화제에는 거리 퍼레이드가 부활한다. 행렬은 중구 동헌에서 번영교를 거쳐 주행사장인 남구 문화예술회관까지 이어진다. 주테마는 헌강왕과 처용의 만남이다. 삼국유사의 처용설화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모두가 처용문화제를 시민의 축제로 승화시켜 보려는 노력에서 기획된 것이다.

축제는 시민공동체의 대동제 성격도 있지만 문화관광상품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처용문화제도 곧 50회를 맞는다. 연륜이 적지 않다.

처용설화의 현대적 해석과 적용 등도 면밀히 연구해 명실공히 울산을 대표하는 명품 축제로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강귀일 취재1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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