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회-6. 아버지, 그 아버지의 나라(8)
70회-6. 아버지, 그 아버지의 나라(8)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9.1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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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시 눈을 감은 부왕의 얼굴엔 지난날의 기억이 그대로 배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태자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내 손으로 니 어미를 유폐시켜야 했던 바로 그 석굴에 며느리인 태자비를 내 손으로 유폐시켜야 하다니, 태자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이다지도 기구한 운명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부왕의 말은 쉬엄쉬엄 계속되었다.

“한 나라 국왕의 길이 이렇게 가시밭길과 같단 말인가? 차라리 이름 없는 필부로 산자락의 움막에 기대어 살았더라면 이런 운명은 피해갈 수 있었을까? 운명이라 하더라도 너무 기구하구나. 어쩌면 내가 가야산신인 정견모주의 노여움을 샀거나 지하에 계신 선왕들을 잘 모시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의 죄가 크기 때문에 겪는 고통인지도 모르겠구나.”

부왕의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만백성 앞에서 위풍당당한 그 자세 속에 참고 감추어 두었던 그 마음의 아픔이 눈물로 쏟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노쇠한 부왕의 얼굴에 굴러 내리는 눈물이 진수라니의 눈물이 되어 가슴에 흘러내렸다.

“이제 너의 비를 용서해 주어라. 그 많은 세월 고통이 어떠했겠는가? 이제는 용서할 시간이 되었는 것 같구나.”

부왕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유시처럼 남기고 삼일 만에 눈을 감았다.

‘이 밤 부왕은 지하에서 나의 이 심사를 지켜보고 계실까? 그 꿈은 분명 현몽일 턴데 아내를 용서하라는 말일까? 아니면 이제 어머니를 다시 찾으란 말일까?’

생각이 생각을 낳아 수많은 생각으로 이어졌다. 생각은 늪과 같았다. 한 번 빠지니 헤어나지 못하고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자연의 이치는 묘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그 밤의 수렁에도 새벽은 왔다. 문살의 골격이 미명 속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진수라니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오늘은 서역의 사람들이 올 거라는 연락이 있지 않았던가. 옥전의 구슬과 금을 구하러 먼 길을 마다 않고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긴 그것이 이번만은 아니지만…….’

아침이 되니 아침의 생각이 기다리고 있었다. 왕은 평소보다 일찍 정전으로 나아갔다. 시관들이 아침 배례를 드리러 왔다. 고운 얼굴에 예쁜 옷을 차려입은 궁녀들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지난밤 악몽의 기억을 떨쳐버리려고 궁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한나절을 보냈다. 지난 여름 폭우에 무너진 청패산성을 다시 쌓는 일로 하한기 진파라가 다녀가고 이수위 무도치도 다녀갔다. 한낮이 되도록 서역에서 온다는 사람들은 연락이 없다가 해가 서산에 넘어갈 무렵 하한기가 왔다.

“전하, 서역에서 온 자가 오기는 왔사옵니다.”

하한기의 말끝이 휘어졌다.

글=이충호/그림=황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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