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걸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9.1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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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추석명절을 보내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만나는 사람마다 추석명절이 예년만 못하다고 말한다. 누구는 가난을 짊어지고 고향을 떠나와 고향이 없어서 추석이 쓸쓸하다 말하고, 어떤 이는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만 해서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했다고, 또는 종교적인 이유로 조상의 묘소를 찾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 같이 일상과 특별할 것이 없다고들 말하니 명절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고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십수년 전만해도 명절에만 때때옷을 마련해 입고, 기름지고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차례를 마치고나선 이웃 사람들이 각자의 힘과 기량을 뽐내는 시간을 갖는 일종의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평상시에 기름진 음식을 먹고 전국에서 열흘이 멀다않고 축제를 벌이니 천상병 시인의 말을 빌려 ‘날마다 소풍’같은 날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필자의 경우도 고향을 찾아 성묘를 할 때 일일이 찾아다닐 수가 없어 망배를 드리고 올 때가 대부분이다. 왜냐면 숲길을 헤치고 조상의 묘소를 찾아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랑할 만한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고향을 찾는 이유는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걸어왔던 길을 이야기해주고, 조상들이 걸어왔던 발자취를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다.

한편, 우리 고유의 민속 명절은 세상을 바쁘게 살다 그 세상에서 잠시 내려와 주변을 둘러보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명절은 우리에게 쉼표와 같은 시간들이 된다. 귀성길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공간에서 공간으로의 연결을 의미하니 필연적으로는 만남을 위한 시간인 셈이다.

우리는 그 길 위에서 역사 문화와 자연과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가족문화를 아우르는 스토리텔링이 고향을 향하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조상의 묘소를 찾고 돌아보는 일이 단순한 유교적 형식을 거치는 것에 국한하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 될 듯 해 보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의미 없는 것에서 상호인식을 통하여 의미 있는 것으로, 예컨대 존재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진리를 형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시 구절이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제주도는 올레길에 이어 순례길이 새로이 걷기 열풍을 이어갈 것으로 주목 받고 있다. ‘올레’는 원래 ‘집 대문에서 큰길까지 이어지는 아주 좁은 골목’을 뜻하는 제주어다. 이 올레길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 영감을 얻어서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지금은 제주도의 일등 문화 상품이 되었다.

네덜란드 작가 세스 노터봄은 “스페인이라는 보물창고는 캐고 또 캐도 바닥이 안 보인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로만 가서는 스페인을 제대로 알 수 없다. 경이로움의 끝을 모른다”며 걸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명문으로 전파하고 있을 정도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제주 올레길 뿐만 아니라 ‘길’은 인간의 삶을 통해 조금씩 다져지고 만들어진 이동과 소통을 위한 통로였기에 이야기가 풍부하다. 그러므로 자동차 여행으로 느낄 수 없는 자연의 소소한 아름다움을 직접 느끼며 그 길이 간직하고 있는 역사 문화적 사건이나 인물 유적지가 숨 쉬고 있는 길을 걸으며 그 숨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내년 추석에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고향의 길’을 걸으며 삶의 여유와 질을 추구하며 진정한 가족의 소중한 가치와 명절의 의미를 되새겨 보면 어떨까?

‘길’ 위에 고스란히 쌓여있는 역사의 가치를 재발견 하는 경험을 통해 자기만의 인문학을 경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김재범 자운도예연구소 도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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