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남긴 긴 그림자
추석이 남긴 긴 그림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9.10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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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들긴 했어도 한가위는 한가위다. 더위도 어느덧 한풀이 꺾여 아침저녁엔 서늘한 바람이 내리고 뒷동산 올밤은 벌써 벌어져 아람을 굴린다. 벼가 고개를 숙인 들녘에는 누런빛이 서리어 간다. 추석 달은 더없이 크고 둥글다. 그래서 마음도 부풀어 오른다. ‘한가위’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고향의 명절 모습은 날이 갈수록 낯설고 빠르게 변해간다. 급속한 노령화를 겪고 있는 농어촌이 다 그렇겠지만 무엇보다 고향에 남은 사람들의 기력이 짚불처럼 사위어간다. 또 그들의 삶에 쓸쓸함과 허전함이 더해만 간다. 마을마다 허물어져가는 빈 집이 늘어가고 그 자리엔 잡초만 어지럽게 무성하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노인들의 가슴이 허허롭기 그지없단다. 어떤 분들은 거저 먹먹하다고 한다. 남편을 먼저 보낸 외짝 안노인도 많지만 짝을 잃은 바깥 외기러기도 늘어가고 있다. 도시에 아내를 남겨두고 혼자 고향에 들어와 사는 본의 아닌 홀아비들도 늘어만 간다. 여기에 혹처럼 손주가 붙어사는 기형적인 조손가정도 있다. 이들의 명절은 그리움과 기다림이다.

그래서 고향의 명절은 쓸쓸함과 기다림이 묘한 조합을 이루는 시기로 변해가고 있다. 도회지 삶이란게 그리 만만치 않다. 긴 불황의 늪을 헤어나지 못한 고향 떠난 이들의 삶은 명절 모습에도 그대로 비친다. 올 추석에 온 누구네 집 사위가 예전의 그 사위가 아니라고들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배운 것 없이 객지에 나가서 사는 것이 험하다더니 끝내 해로하지 못한 모양이다.

차례를 지내고 모처럼 둘러앉은 대소간 가족들의 추석민심은 즐겁고 유쾌하지만 세월호 사건, 병영구타사건 같은 끔찍한 일들을 다함께 겪은지라 금세 목소리가 높아지고 격해진다. ‘도대체 이 나라 정치하는 X들 하나 같이 못 믿을 것들이며, 도씨 성 가진 것들’이라고 목청을 높인다. 고향에 사는 사람, 고향에 온 사람들이 오랜만에 만장일치로 하는 소리다. 그래도 예전엔 이런 말이 나오면 고향사람들은 말리고 역성을 드는 편이었는데 이젠 한목소리다. 도농(都農)이 다 살기 팍팍하다는 소리다. 막걸리 잔이 몇 순배 돌자 오히려 농촌에 남은 이들의 울분이 먼저 터진다. ‘농협이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데서 시작한 푸념이 ‘농협이 차례 상에 올릴 조기를 재래시장보다 오천 원 하나는 더 비싸게 받는다’는 대목에 이르자 ‘지들 잇속만 챙긴다’며 육두문자로 바뀌고 만다. 농협에 목이 매여 사는 농사짓는 친구들의 속을 들여다 보고나면 이해하고도 남는 사정이다. 노인연금 국민연금이 갈팡질팡한 것도 조목조목 짚어 따진다. 마치 내가 당국이라도 되는 양 다그치니 민망하다. 나라 일이란 크나 작으나 그 책임이 이렇게 무거운 것이다. 작은 추석날 늦은 오후 혹은 밤늦게 잠깐 삐죽 왔다가 차례 상 물리기 무섭게 바리바리 챙겨서 달아나 버리는 요즘의 명절 풍속도가 남은 사람들에게는 감질나고 야속하다. 언제부터 우리 고유 명절이 이렇게 더 큰 쓸쓸함과 그리움만 남기게 됐는가. 올 추석은 연휴가 길어 다른 때보다 더 풍성할 것이라고들 했는데 용돈 몇 닢 던져주고 고추자루, 깨 주머니 챙겨서 벌에 쏘인 듯 달아나버리는 사람들이 있어 올 해 한가위 달은 그립고 쓸쓸한 긴 그림자만 드리우고 있다.

<박기태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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