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요구해야 할 항복문서
일본에 요구해야 할 항복문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9.03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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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에 대해 무조건항복을 선언했다.

그래서 이날을 우리는 광복절이라고 부른다. 일본은 이날을 종전기념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이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한 것은 그해 9월 2일이었다. 중국은 그 다음 날인 9월3일을 항일전쟁 승리기념일이라고 한다. 중국은 올해부터 이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항복문서조인식은 도쿄만에 정박해 있던 미국전함 미주리호 갑판에서 거행됐다. 일본은 이날 ‘포츠담선언 수락에 따른 무조건항복 계약서’에 서명한 것이다.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 앞에서 서명한 사람은 두 명이었다. 일본 정부 대표로 당시 일본 외무대신이었던 시게미쓰 마모루(重光 葵)가 나왔다. 군부 대표로는 대본영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梅津 美治郞)가 함께 했다.

연미복을 차려 입은 시게미쓰는 오른쪽 다리를 절며 단장에 의지해 함상으로 올라왔다.

이에 앞서 일본군은 중국에서도 중국군에 항복문서를 제출했다. 그해 8월 21일 일본군의 중국파견군 지도부는 중국 후난(湖南)성 즈장(芷江)현에 있던 국민당군 육군총사령부 본부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그 법통을 이은 대한민국에는 항복문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1940년 광복군을 창설하고 그 이듬해 일본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했다. 광복군은 중국 국민당군의 지휘를 받았다. 따라서 임시정부 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것이다.

물론 일본이 이를 인정할 리 없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던 시게미쓰의 오른쪽 다리다. 시게미쓰는 1932년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도시락폭탄에 맞아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외교관인 시게미쓰는 당시 상하이 주재 일본공사였다.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일인들이 제1차 상하이사변 승전을 자축하던 자리에서 윤 의사의 폭탄은 작렬했다. 행사에 참석했던 일인들은 축포 21발을 쏘고 천황을 찬양하는 기미가요를 부르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후송된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도 절명했다.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을 당했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실명됐다.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도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 당했다.

윤 의사의 거사를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제스(蔣介石)는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장제스는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해방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할 때도 장제스는 부인 쑹메이링(宋美齡)과 함께 임정 국무위원 등 2백여 명을 초청해 환송회를 열어줬다. 환송회는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도 열어줬다.

대한민국 헌법은 전문(前文)에서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명시하고 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 받은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를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은 일본에 지금이라도 항복문서를 요구해야 한다.

<강귀일 취재1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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