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와 왕소군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와 왕소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8.27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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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내몽골(Inner Mongolia)로 잘 알려져 있는 내몽고자치구는 대륙 북부와 동부에 걸쳐 길게 자리하고 있다. 중국 내 최초의 자치구로서 신장과 티베트에 이어 세 번째로 넓으며, 초원과 사막으로 이루어진 해발 1천800m의 고원이다. 청 강희제 때 내몽골 확보를 위한 강력한 정주정책 이후, 현재의 내몽고자치구 형태가 갖추어지면서 중국의 일부가 되었다. 2천360만 명의 인구 중 한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몽골족은 40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옛날 이곳 내몽골은 몽골계열인 흉노가 지배했던 거대한 유목국가였다.

후스(呼市)로 약칭되는 성도 후허하오터는 푸른 도시 청성을 의미한다. 230만 명의 주민 중 몽골인은 30만 정도이고 회족과 만주족 등 47개 민족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 보통 베이징에서 저녁 무렵에 출발하는 기차에 오르면 다음날 아침 동틀 때쯤 이곳에 도착할 수 있다.

후허하오터는 어디를 가도 몽골어와 중국어가 함께 사용된다. 길거리 간판에도 몽골어와 중국어가 함께 쓰여 있고, 내몽골방송국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보아도 몽골족과 한족 아나운서가 함께 출연하여 두 언어를 번갈아 사용하며 자막 역시 두 언어가 동시에 표기된다. 다민족 국가의 전형적인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내몽골에는 중국 4대 미인 중 하나였던 왕소군(王昭君)의 묘지가 있다. 그녀에 관한 고사를 통해 보면 지금과는 달리 당시 강국 흉노국과 약소국 한 왕조의 교류사를 엿볼 수 있다.

왕소군은 서한 말 원제(元帝)의 궁녀로서 흉노와의 친화정책을 위해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갔고, 그가 죽자 그의 아들에게 재가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당시 문헌인 ‘서경잡기(西京雜記)’에 보면 원제에게 후궁이 너무 많아 일일이 그녀들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공에게 일러 그녀들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이에 후궁들은 화공에게 잘 보이려고 뇌물을 바쳤는데 왕소군만은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화공에게 밉게 보인 덕에 초상도 실물보다 터무니없이 못나게 그려졌으니 천자의 눈길을 끌 리가 없었다.

그럴 즈음 세력이 커진 흉노가 입조하여 한 왕조의 여인들을 구하였다. 원제는 화공이 올린 초상화를 보고 왕소군이 제일 못생긴 줄로만 알고 그녀의 초상화에 점을 찍어 흉노족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수레에 실려 가는 그녀의 미모를 보게 된 원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만다. 그녀가 후궁 중 제일 가는 미녀였기 때문이다. 땅을 치며 후회하였지만 이미 결정된 일인지라 번복할 수가 없었다. 책임을 물어 그녀를 훨씬 못 미치게 그린 화공을 죽이고 재산도 몰수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 드라마틱하고도 슬픈 왕소군 이야기는 약소국 한 왕조가 강대국 흉노를 달래기 위한 화친정책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후일 이백은 ‘왕소군’이라는 시에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漢家秦地月

한나라 진 땅의 달이

流影送明妃

달그림자 뿌리며 명비를 보내네.

一上玉關道

한 번 옥문관을 나서더니

天涯去不歸

하늘 끝에 가 다시는 오지 않네.

漢月還從東海出

한나라의 달은 여전히 동해에 뜨건만

明妃西嫁無來日

명비는 서쪽 땅으로 가더니 돌아오지 않네.

燕支長寒雪作花

연지산은 늘 추워 눈꽃을 만들고

峨眉憔悴沒胡沙

미인은 초췌해져 오랑캐 땅에 묻히네.

生乏黃金枉圖畵

살아선 황금이 없어 초상화를 잘못 그리게 하더니

死留靑塚使人嗟

죽어선 청총을 남겨 탄식케 한다.

당시 흉노의 막강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왕소군은 힘을 다해 양국 화친을 위해 애썼고, 사후 이곳 내몽골에 묻힌다. 나약한 한 여인의 지혜로 이룩한 평화의 기운은 지금도 이곳 묘지를 찾아와 그녀를 추모하는 중국인들의 발길에서 느낄 수 있다.

울산대 국제학부 이인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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