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지나가는 말 속에서 ‘충격’을 받는다. 북한이 동해로 미사일을 발사할 때였다. 뉴스에서 실시간으로 속보를 전할 때쯤, 오후 하교시간이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이었는데 친구들과 걸어가며 하는 소리가 충격적이다. “북한이 또 미사일 쐈다며? 확 전쟁이나 나버려라”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세상이 뒤짚히길 바라는 게 아닌가! 난세를 부르고 있지 않은가. 난세는 모든게 불명확하다. 지금 현실이 마음둘 데가 없음이니 난세가 아니고 무엇일까.
영화 ‘명량’이 폭발적 인기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13척의 배로 300척이 넘는 왜(倭)와 맞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불가능을 가능케한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이 조명 되면서 우리는 지금 ‘이순신 장군’에 열광한다.
난세는 영웅을 부른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에 열광하는 이유도 ‘난세’를 종식시킬 ‘영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은 영웅을 뛰어넘은 성웅(聖雄)이다. 우리는 지금 영웅을 뛰어넘은 초월적 존재인 ‘성웅’을 바라는 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세상이 어지럽다는 뜻일게다.
울산상의 차의환 부회장은 명량을 보고 ‘직선의 미학’을 배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문제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파고들어 이를 단박에 해결하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포진을 끝내고 왜선 함대가 나타나자 돌격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휘하 장수들이 왜선 함대의 위용에 놀라 두려움으로 주춤할 때 솔선수범해 돌격해 쳐들어 간다. 때를 놓치면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했던가! 이순신 장군의 함선이 왜선을 격파하자 나머지 장군들이 합세해 명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끈다. 왜선 함대가 우리가 안고 있는 당면한 거대 문제라면 이를 단 칼에 절단((一刀兩斷)내 버려야 한다.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공략하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솔선수범은 리더십이다. 이 리더십의 실천이 ‘직선의 미학’이다. 우리가 이순신에 열광하는 건 솔선수범의 리더십과 얽히고 설킨 문제들을 단칼에 해결할 영웅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초현실적인 영웅을 바라는 현실이 서글프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 놓으려는 억지스러움이기 때문이다. 손자(孫子)는 전쟁을 할 때 안싸우고 이기는 게 제일이라고 했다. 만약 전쟁을 한다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상대보다 많은 병력으로 압도적으로 이기라 했다. 천시와 지리를 따지고 인재를 확보해 순리를 따르라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나 제갈공명 등은 이러한 순리를 거역하고 항상 불리한 전쟁에서 승리한다. 그래서 영웅으로 불린다.
순리를 따르는 것은 세상사는 이치다. 위정자나 민초들도 이 순리 안에서 살아간다. 중국의 변방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했던 비결도 이 순리에 따랐기 때문이다. 진의 초석을 닦은 효공(孝公)이 공자 영이었던 시절 위(衛)나라 사람 앙(?)을 만난다. 위앙은 변법가로 법가를 주창한다. 공자 영이 앙에게 “진이 강성해 지려면 무엇을 해야 되느냐” 물었다. 위앙은 “법을 올바로 세우고 순리에 따르라”며 “백성이 제자리에서 제일을 마음 편히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공장 영은 이 말을 듣고 위앙을 수상으로 초청해 천하통일의 국력을 기른다. 위앙은 나중에 상앙으로 불린다.
지금 세상은 복잡다난하다. 국민들이 마음을 다잡고 제자리에서 제 몫의 역할을 다하는 세월이 됐으면 좋겠다. 영웅 출현을 바라지 않는 세상이 ‘태평성대’다.
<정인준 취재1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