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무심코 지나치던 일몰의 순간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제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일전에 부산 해운대 모처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며칠을 묵어야만 했었습니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우두커니 바다를 바라보거나 광안대교를 오가는 무수한 차량들에 눈길을 주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렵, 완전하게 둥근 선홍빛 해가 광안대교 교각 꼭대기에서 천천히 기둥을 타고 내려와 건너편 아파트 옥상에 잠시 내려앉더니 이윽고 아파트 숲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여느 때의 일몰과 달리 조금도 이글거리지 않으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숯불 빛 같은 또렷한 빛깔을 간직한 채 한 순간 저녁 무렵의 서쪽 하늘을 수놓고 말없이 시야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정말 눈부시지 않아 좋았습니다. 눈부시지 않기에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눈부시지 않아도 제 빛깔을 오롯이 지닌 그 일몰의 순간이 너무도 아름답게 각인되어 오랫동안 눈에서,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네 삶도 어느 시점에서 저녁 해처럼 지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어느 책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사람의 일생을 80년으로 보고, 그걸 하루 시간에 견주어 자기의 인생 시간을 매년 측정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어림잡아 제 시간도 오후 4시 30분은 족히 되는 것 같습니다. 하루에서 오후 네 시 반이면 퇴근 시간이 되어갈 무렵입니다. 밀린 일들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죠. 그렇게 해서 6시쯤에 퇴근하면 어느 날은 친구와 저녁 약속이 잡혀 오랜만에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할 겁니다. 때로는 일찍 집으로 돌아가 저녁밥을 맛있게 먹고 난 뒤 아침에 못다 본 신문도 읽고, 뉴스도 보고, 모처럼 아내와 드라마 한 편도 같이 볼 수 있는 달콤한 시간이 기다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다 잠든 사이 자정이 지나가겠지요.
삶의 ‘하루’ 여정에서 4시 30분은 이제 인생의 활동기 30년을 서서히 정리할 시간입니다. 그리고 머잖아 일에서 해방되어 휴식의 시간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곧이어 삶 전체를 정리해야 할 순간도 어김없이 다가오고 끝내는 긴 잠에 들어야 할 시간도 닥쳐오겠지요. 서녘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떨어지던 그 해처럼 말입니다.
그 마지막 순간의 우리네 모습이 ‘광안대교의 저녁 해’를 닮았으면 합니다. 눈부시지 않아도 뚜렷한 제 빛깔을 간직한 뒷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낮 동안 뜨겁게 세상을 밝히고 남은 불씨를 품어 숯불 같은 은은한 온기를 세상과 이웃에 남길 수 있으면 더욱 좋겠지요. 그래서 ‘아, 눈부시지는 않았어도 오롯이 제 빛깔을 가진 지난날이었다.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날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김홍길 신언중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