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청소년과’ 40년 옥교동 터줏대감
일흔의 참의술… 이젠 황혼지킴이로
‘소아청소년과’ 40년 옥교동 터줏대감
일흔의 참의술… 이젠 황혼지킴이로
  • 양희은 기자
  • 승인 2014.08.05 20:1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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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언 김소아과 원장
1973년 문 연 울산지역 1호 소아과 전문의

아기였던 환자, 자녀함께 내원할때 남다른 감회

더 좋은 도시 울산을 향한 사회활동 의미있어

9월부터 노인요양병원서 생명가치 되새겨볼 것

“1972년 전문의가 되고 울산으로 왔는데 제가 울산 1호 소아과 전문의더군요. 중구 옥교동 현대의원 산부인과에서 소아 전문의로 1년간 일하고 미국으로 공부하러 갈 작정이었죠. 그런데 울산이 좋아 눌러 앉게 됐고 그게 벌써 40년이 넘었습니다. 5월 푸른 태화강의 아름다움이 저를 여기까지 오게 했나 봅니다.”

40년 한자리 소아과 폐업

‘사정으로 폐업합니다. 죄송합니다.’

지난 1일 찾은 중구 옥교동 김 소아청소년과 입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40년이 넘도록 이 자리에서 소아과를 운영한 김용언(73) 원장이 지난달 31일 진료를 끝으로 소아 청진기를 내려 놓았다.

1973년 5월 5일 어린이날 병원 문을 연지 41년만이다. 마지막 서류 정리로 복잡한 원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원장실로 전화 몇 통이 걸려왔다. 예방주사를 문의하는 전화에 김 원장은 “옆 건물 병원에서 예방주사는 계속 놓아 주기로 했다”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는 “73살이면 이제 업무에 벅찰 때도 됐다”며 “요양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이제 어린이 대신 노인들을 살필 예정”이라고 했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김 원장은 경북대 의과대학에서 공부했다. 1972년 전문의 시험에서 1등할 정도로 수재였다.

“대학 졸업 후 선배가 급하게 울산에서 소아과 전문의를 구한다고 하길래 집안 사정도 어렵고 해서 울산으로 왔지요. 그렇게 소아과를 개원하고 울산에서 200만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상에 차트를 기록해 저장하지만 그는 수기 차트도 함께 쓴다. 그렇게 지난 40년 동안 쓴 만년필도 24자루가 된다.

김 원장이 병원 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울산에 소아과 전문의가 없어 인근 내과병원에서 아이들을 보내기도 했다고.

당시 아기였던 환자가 어른이 돼 자신의 자녀를 데리고 다시 병원을 찾을 때면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부모님이 ‘김소아과에 가봐라’해서 오는 환자도 하루 7,80명이 됐다.

김 소아과는 개인병원으로 병리검사실을 갖춘 드문 곳이다. 김 원장은 개업 초기부터 비용이 들더라도 병리검사실을 고집했다. 환자를 진료한 후 바로 대변 검사를 해 세균성과 바이러스성을 구분해 세균성 질환에만 항생제를 사용했다. 그는 돈을 버는 의사가 아니라 연구자의 자세를 유지하고 싶었다.

공해도시 오명 벗고 문화 발전 위해 사회활동 시작

40년간의 병원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어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김 원장은 소아과 전문의로만 아니라 울산에서 오피니언 리더로 활발히 활동했다. 1994년부터 칼럼을 쓰기 시작해 지금까지 100여편의 글을 지역신문에 실었다.

울산에 머무는 동안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갈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5월의 태화강에 반해 울산에 정착했지만 공해가 심하고 문화시설도 부족한 울산을 떠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자녀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아빠의 고향이 대구라면 우리의 고향은 울산’이라는 자녀들의 말에 그제서야 어떻게 하면 울산을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지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로 활동하며 울산의 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소아과 의사를 해 보니 나쁜 공기 때문에 기침을 하고 기관지 이상을 보이는 환아들이 많았다는 거다.

울산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초대 공동대표로도 이름을 올리고 본격 사회참여활동을 시작했다.

문화 불모지라는 인상을 씻기 위해 울산국악협회 회장도 맡았었고 울산수필동인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울산 YMCA 이사장, 로타리클럽 3720지구 부총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등을 두루 거치며 울산을 어떻게 살기 좋은 도시로 키워 나갈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이제는 고향이 울산이라고 할 정도로 울산사람이 된 그는 처음 만나는 누구에게나 “이런 도시가 없다”고 자랑을 늘어 놓는다.

영남알프스라는 아름다운 산과 20분 거리에 있는 동해바다, 조금만 차를 타고 움직이면 신라고도 경주가 있고, 우리나라 제2의 도시 부산이 있는 곳. 골프를 치거나 난을 키우는 취미활동을 하기에도 그저 그만인 도시.

새싹 보호자에서 황혼 지킴이로

그는 지난달 31일 병원 문을 닫으며 10년 가까이 같이 일하던 간호사들을 하나하나 안아줬다. 그는 지금껏 간호사들을 한번도 내 보낸적이 없다. 지금까지 5,60명의 간호사가 병원을 거쳐갔다.

8월 한달은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갈 작정이란다. 그리고 9월부터는 노인들을 돌보는 의사로 돌아간다.

그는 “나도 나이가 들었으니 그들과 함께 생명에 대한 소중함도 느껴보며 좋은 이웃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다”면서 “다른 황혼을 위해 내 노년도 함께 보내겠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이제 새싹들의 보호자에서 황혼의 지킴이가 된다.

글·사진= 양희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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