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회-3. 늑대와 달(12)
36회-3. 늑대와 달(12)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7.21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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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었던 모양이오…….”

한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캄캄한 어둠 속에 저하께서 와 주신 것만으로도 소녀는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사옵니다. 이제 부디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아들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이승에서 너희들을 만나서 행복했었다고 전해 주십시오.”

여자는 눈물로 목이 메었다. 여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원망하지는 마시오. 내가 가진 힘이 여기까지라서 당신을 구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하늘의 뜻이 아니겠소.”

진수라니도 목이 멨다. 그는 자신이 뱉은 그 말이 스스로의 귀에도 슬프게 들려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갑자기 앞이 더 캄캄해지는 것 같은 현기증을 느끼며 석굴 밖으로 발을 옮겼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이제 달은 중천에 떠서 천길 절벽 위로 영롱한 빛을 내리붓고 있었다.

말을 돌려 산을 내릴 때 어디선가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산허리를 감고 도는 처절한 소리가 메아리처럼 긴 여운을 남기며 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도 오늘처럼 달이 밝고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들렸었지…….’

한기는 말을 세우고 늑대의 울음소리가 오는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끊어질듯 이어지는 그 소리. 한기는 눈을 감았다. 어떤 운명의 암시였을까, 처녀 시절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옛날 거루산성이 생기기 오래 전에 저 산속에서 한 남자가 사랑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서 늑대가 되었대요. 달 밝은 밤이면 이루지 못한 그 사랑을 찾아 헤맨다는 군요.”

그 말을 했던 그때도 달밤이었다. 그녀와 함께 말을 타고 고자국(소가야, 고성가야)의 들판을 달리던 그때도 분명 달밤이었다. 다라국의 야철지에서 생산된 철을 왜국으로 수출하기 위한 교역로를 얻어내기 위해 왜국의 사신과 함께 고자국의 궁성으로 가는 길에 변경의 한 산성에서 처음 만났던 그녀였다.

애잔하면서도 아름다운 눈을 가졌던 그녀였다. 그래서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의 젊고 아름다운 몸이 그리워 수십 개의 산을 넘고 또 강을 건너서 그녀를 찾아가곤 했다. 고자국의 들판을 가로지르며 그녀와 함께 말을 달리던 그날 밤도 달빛이 오늘처럼 쏟아지는 날이었다.

‘그녀가 지금 죽는다면, 그녀가 죽어서 외로운 넋이 된다면 달밤에 돌아와서 저 늑대들처럼 울면서 이 산천을 헤매고 다닐까…….’

진수라니의 귀에는, 늑대의 소리에 그녀의 울음소리가 겹쳐져서 들리는 것 같았다. 진수라니는 환청처럼 점점 크게 들리는 그 소리를 떨치려고 고개를 저었다.

글=이충호/그림=황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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