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의 사회
이분법의 사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7.20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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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이분법의 사회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존경한다는 이들은 박정희와 이승만을 혐오하고, 반대로 박정희와 이승만을 존경한다는 이들은 김대중과 노무현을 혐오한다. 덜 존경하거나 비판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우리 사회에 발을 못 붙이도록 없애야 할 저주받을 대상으로 여긴다.

어쩌면 이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를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하는 곳이 학교가 아닌가 싶다. 한국 학교의 교육과정은 평가에 지배되어 있다. 평가하지 않는 내용이라면 학생들은 아예 학습조차 하지 않는다. 학생뿐 아니라 학부모도 평가에는 목숨을 거는 곳이 우리 사회의 학교다.

그런데 학교의 평가에 들어서면 두 가지 길밖에 없다. 정답 아니면 오답인 것이다. 간혹 독특한 생각을 펼치는 학생이 있다면 그는 정답과 오답의 잣대에 의한 칭찬과 질책의 통제 속에 순치되거나 그것을 거부한다면 열외자의 낙인 속에 전락하고 만다. 다양한 생각을 존중하는 교사는 아직 교육이 뭔지 모르는 낭만적 부류이거나 제대로 하는 것이라곤 없이 입만 살아 있는 무능력한 이상주의자로 치부될 것이다.

학교가 집요하게 재생산하는 이분법의 공식은 일상적 인간관계에서까지도 뼛속 깊이 각인된다. 학교생활에서 교사와 학생은 그 존재 형태부터 명확히 구분된다. 교사는 학생에 대해 사랑의 의무를 지고 학생은 교사에 대해 존경의 의무를 진다. 사제 간의 미덕이라는 이름으로 지는 의무이다. 그러나 사랑이나 존경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정서일 뿐 문화적 성숙을 통해 얻어지는 가치가 아니다. 사랑과 존경의 가면 속에 안주하면서 이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를 잃어버린 듯하다. 학생 인권을 말하면 교권 훼손을 염려하고 교권 확립을 위해서는 학생 인권의 제한은 불가피하다 여기는 것이다. 인권이라는 문명사회 보편의 문화가 21세기의 사회에서 이토록 정착이 어려운 것은 이해되기 힘든 일이다.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는 제반 인간관계의 왜곡이 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회에 진출해서도 우리의 대인 관계란 두 가지로 정리된다. 윗사람을 향해서는 깍듯이 고개 숙여 존경의 예를 표하고 아랫사람은 머리 쓰다듬고 등을 토닥이는 자애로움을 보여 확실히 관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사회 속에서 나의 위치가 분명히 정해지고 삶이 원만해지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 사랑과 존경이라는 허위의식의 가면을 벗고자 한다면 그는 이 사회에서 고립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서너 살 위의 동료에게 섣불리 친구의 태도로 접근하다간 낭패를 볼 것이며 아랫사람들에게 계속 존중의 미덕을 보이다간 자칫 그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가 사라지는 참담함을 겪을 수도 있다. 우리는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나?

정치적 성향에 있어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정치적 견해가 보수 아니면 진보로 분류되는 이 이분법은 과연 우리 사회의 정치의식을 성장시키고 있는 것일까? 교권을 위해서는 학생 인권이 제한되어야 하는 사회, 300여명의 목숨을 잃고도 사태의 진상 규명조차 진영 논리의 갈등으로 지지부진하는 사회는 앞날이 없다. 이제 우리는 바뀌어야 한다. 뿌린 자가 거두어야 하듯이 이 모순의 틀을 부술 자는 학교다.

우리가 다양한 생각을 존중하는 교육을 열어 간다면, 교사와 학생이 존경과 사랑이라는 가면을 벗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삶을 만들어 간다면, 우리 사회의 해묵은 이분법의 틀에도 균열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 틈에서 다원적 사고의 작은 싹이 새로운 희망으로 피어날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가 학교의 혁신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이유이다.

<서상호 효정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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