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회-2. 칼 앞에 맹세(11)
23회-2. 칼 앞에 맹세(11)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7.02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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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쇠하여 위엄이 사라진 왕은 칼 앞에 얼마나 절망하였을까, 힘을 쓸 수 없는 노쇠한 국주가 되어 칼 앞에서 얼마나 울었을까. 그 울음이 맺혀 다시 노기처럼 충천하여 다시 아들을 불러 일어서게 한 것일까. 왕의 뇌리엔 수많은 생각이 스쳐가는 듯 아들이 치켜든 칼끝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기는 그 칼로 나라의 업을 위대하게 하라.”

왕의 목소리가 떨렸다.

“기필코 그 뜻을 이루겠나이다. 부왕마마!”

진수라니 한기(왕권을 대행할 수 있는 왕 바로 아래 직위)는 칼을 칼집에 꽂고 부왕을 향해 돌아서서 무릎을 꿇었다. 한기의 말은 우렁찼다. 그는 의지에 찬 눈으로 부왕을 쳐다보았다. 분명 그것이었다. 왕이 바랐던 그 모습, 패기에 찬 그러면서도 깊고 지혜로운 그 모습이었다. 왕은, 이제 자신의 뒤를 이어 이 나라를 이어갈 주군으로서 당당하고 용맹스런 그 모습, 그러면서도 만백성을 가슴에 안고 갈 넉넉한 그 모습을 지금 진수라니 태자의 얼굴에서 보고 있었다.

왕은 진수라니 태자가 믿음직스러웠다. 태자비가 저지른 일로 인해서 조정에서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하한기(한기 바로 아래 직위) 필모구라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에게 태자의 자리를 내어 놓으라는 공격을 받으면서도 슬기롭게 인내하며 나라의 일과 개인의 일을 구별할 줄 알았던, 그래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꿋꿋하게 자신을 지켜왔던 태자가 믿음직스러웠다. 앞으로 어떤 혼란과 위기에도 헤쳐 나갈 수 있는 능력을 태자 한기가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왕은 모처럼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나라의 업을 위대하게 하소서!”

배석해 있던 대신들과 군장들이 일제히 외치듯 말했다. 지켜보는 신하들도 모두 자리에 엎드렸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순간이었다.

대신들은, 왕이 진수라니 태자를 한기로 임명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왕이 죽으면 관례에 따라 태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리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한기로 임명하여 나라의 일을 맡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궁성 내의 힘의 형국이 바뀌게 되었다. 필모구라 하한기는 당황스러웠다. 태자가 한기의 자리에 임명됨으로 인해서, 남부여(백제)와의 동맹으로 군사력을 보강하여 신라에 맞서려는 그의 전략에 차질이 생겼다.

한기가 공석이었던 상황에서는 왕의 명령을 받아 나라의 전권을 행사했던 그였지만 이제 그는 자신이 행해왔던 모든 권한을 진수라니 한기에게 넘겨주어야 했기 때문에 그가 생각해왔던 전략을 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한기기 그의 전략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 같아보이지는 않았다.

무태산성 석굴에 가두어 둔 태자비의 처형도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태자비를 살려주게 되는 것은 자신의 소신과 주장이 헛된 것이 되며 종국엔 자신이 피해를 입게 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선 모든 것을 자신이 뒤집어쓰고 도리어 목이 날아가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과 그 앞에 선 진수라니 한기를 바라보는 필모구라 하한기의 머리엔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가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서열이 뒤바뀌게 된 처지였다.

글=이충호/그림=황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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