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 김기오를 아십니까
우석 김기오를 아십니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6.30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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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정명600년을 맞아 ‘울산의 인물’을 찾는 사업을 울산학연구센터에서 주관하고 있다. 하지만 인물 선정에서 의견들이 분분하고 어떤 기준으로 인물을 선정할 것인가를 두고도 의견일치가 쉽사리 이뤄지지 않는 것 같다.

지난 2013년 울주문화원은 울주문화 13집 특집을 통해 우석 김기오를 재조명한 바 있다. 우석은 언양 출신이지만 후손이 없어 그 동안 잘 알려 지지 않았다. 그는 1900년 11월 8일 울주군 언양면 남부리에서 부 김연곤과 모 월성 최씨 사이에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 뒤 우석은 독립운동, 언론, 청년운동, 민족주의자로 인쇄, 출판인으로 우리나라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예 월간지 ‘현대문학’을 창간해 한국문학의 지평을 열었다. 1955년 1월 창간된 ‘현대문학’은 오늘날까지도 문학의 열정을 태우는 젊은이들에게 지성과 감성을 깨우치는 문학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우석은 6세 때 한학 공부를 시작해 언양에서만 10년 넘도록 공부했다고 한다. 그의 유년시절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해방직후 새로운 한국정부를 세우기 위해 과도 정부가 들어섰다. 당시 제일 시급한 것이 교육이었다. 우리말 교과서가 필요했지만 열악한 출판 환경과 정부의 예산지원이 없어 출판 이윤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실업계학교 교과서는 종류는 많고 수요는 적어서 출판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우석이 그 일을 하겠다고 뛰어들었다. 우석이 교과서 사업에 선뜻 나선 것은 국가발전에 교과서가 필수적이며 생산 공급이 시급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한교과서주식회사 창립은 교육으로 나라를 일으킨다는 시대적 소명에 부응하는 애국사업이었다. 창립의 의의를 요약해 보면 첫째는 중등과정용 교과서에서 실업전문교과서 생산은 실업교육으로서 국력신장이라는 국가적 현안을 실현하는 일이며 둘째는 새 국정교과서 생산을 통해 일제 식민지 잔재를 추방할 수 있으며 셋째는 민족적 양심을 바탕에 둔 국민교육에 기여한다는 점이며 넷째는 보다 품질이 우수하고 값이 싼 교과서를 적기에 생산하여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석은 우리나라의 인쇄, 출판업계의 기반 조성을 이루고 대한교과서주식회사를 창립했다. 그는 교육잡지 발간에도 노력했다. 교육전문지‘아동교육’, ‘조선교육’과 어린이 계몽지 ‘소년’, 월간문학지인 ‘현대문학’을 발간했다. 이중 ‘현대문학’만 문학지이고 나머지는 교육 잡지이다. 이렇듯 우석이 잡지를 출간한데는 교육과 사회공헌, 공익적인 면을 우선하는 그의 사업철학이 있었다.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없는 신념과 의지, 교육, 문화적인 사고와 인생관, 자기희생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55년 1월 우리문단에 문예전문지 한권이 없던 상황에서 그는‘현대문학’을 창간했다. ‘현대문학’은 우리나라 최장수 문학잡지이며 대한민국의 현대문학사다. 배출된 문인과 작품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우석이 ‘현대문학’창간을 결심한 것은 6·25 전쟁 중 피난 온 부산에서 고향 후배 오영수를 만나면서다. 이윤을 초월하여 한국문학을 위해 순수문예지로 창간하고자 한 그는 서울로 돌아온 후 당시 우리니라에 하나밖에 없었던 ‘文藝’지가 종간 됐다는 소식을 오영수로부터 전해 듣고 “한 독립 국가에 문예 전문지가 없다는 것은 더 없는 수치요, 문화적 두뇌마비”라고 개탄했다.

창간 당시 우석이 내린 결단은 그가 얼마나 우리의 출판과 교육, 문화 사업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는가를 보여준다. 우석은 사업가로서 사적 이익보다 공적이익, 개인 영달보다 국가, 교육과 문화에 아낌없는 투자를 했다. 그의 행적과 업적은 문화적 가치와 재산이다.

<김금자 울주문화원 사무국장·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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