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둥이
6·25 전쟁둥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6.26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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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악몽이었다. 동족끼리 이렇게 처절히 싸운 전쟁은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 끔직한 전쟁이 발발한 지 64년이 됐다. 어느덧 60대에 접어든 전쟁둥이들이 살아온 세월이 바로 그 전쟁 이후의 모습이다. 하지만 전쟁 도중에 태어났던 전쟁둥이들의 삶을 후손들은 아마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필자도 전쟁둥이다. 이제는 대구시로 편입된 고산이라는 외곽지역에서 8형제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출생지를 강조한 것은 직접 낙동강 전투가 벌어진 곳은 아니지만 전투 지역과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선친이 초등학교 교장이어서 우리 가족들은 사택에 거주했다. 그런데 그 학교에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미군들이 칠면조 고기를 모친에게 권유해 전쟁 와중에 태어났지만 몸무게가 많이 나갔다고 한다. 그 뒤 경주로 옮겨와 7년을 살았다. 지금도 천마총 옆에 황남초등학교가 있다. 그때는 천마총은 없었고 봉황대만 여러개 있었다. 그 뒤 다시 대구로 돌아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런데 그 지역에 전쟁고아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하루에도 여러차례 교내 폭행사고가 벌어졌다. 초등학교 교문 앞에 문구와 만화를 대출하는 가게가 있었다. 레슬링 경기가 있는 날은 만화가게의 텔레비전을 통해 경기를 보려고 한참 동안 기다리곤 했다. 학교를 파한 뒤 골목에서 구슬치기, 땅 따먹기, 딱지치기를 했다. 당시 어린 꼬마들의 놀이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당시는 중학교도 입학시험을 치렀다. 시험 과목은 국어, 산수, 주판이었다. 고등학교 입시에서는 중학교 교육과정 전과목을 대상으로 하루 종일 시험을 쳤다. 고등학교 때는 ‘교련’ 수업시간에 목총을 들고 제식 훈련도 받았다. 교복 외에 ‘교련복’도 있었다. 지금 청소년들로선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전쟁둥이들은 겪으며 지냈다. 국민교육헌장을 열심히 외었던 기억도 난다.

그때는 ‘대학예비고사’라는 것도 있었다. 전국 대학 정원의 배수 정도만 통과시켜 대학 지원 자격을 부여했기 때문에 이 시험이 대학 합격의 1차 관문이었다. 환경때문에 서울로 진학할 수 없는 학생들은 지방 국립대학을 선호했다. 특히 지방 국립대 사법대학을 선호한 이유는 졸업과 동시에 중고교 교사로 전원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그 때는 임용고사 없이 졸업과 동시에 발령이 났다. 등록금도 저렴했다. 전쟁둥이들은 시국관련 소용돌이 속에서 살기도 했다. 대학 1학년 때는 교련 반대 데모, 3학년 때는 ‘유신’으로 대학 강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지금 기억에도 어릴 때 옷이 흔치 않았다. 천도 귀해서 옷을 기워 입기도 어려웠다. 목욕도 1년 중 명절 대목에만 목욕을 하던 아이들이 이제 매일 목욕하는 60대가 되었다. 초등학교에서는 원조품으로 들어온 우유를 학교급식소가 끓여 학생들에게 단체로 먹이던 것이 당시의 모습이었다. 전쟁 기아로 아이들이 영양실조의 위협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 우유 한 잔은 대단한 영양 공급원이었다. 우유가 남으면 학교에서 도시락에 담아가게 했다. 고등학교 때는 군대에서 버린 낡은 군화를 시장에서 구입해 3년 동안 신고 다녔다. 경제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에 20대를 맞았기 때문에 전쟁둥이들이 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것은 하나의 행운이었다. 기술만 습득하면 공장에서 서로 데려가려 했고, 대기업에도 입사할 기회가 많았다.

60여 년 동안 우리가 경험한 내용을 정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전쟁둥이들의 공통분모를 찾아보는 것은 후배들을 위한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전쟁둥이들은 대부분 적극적으로 삶을 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 전쟁 이후의 궁핍한 삶을 후손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윤주은 울산과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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