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오늘을 바쳤다
당신들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오늘을 바쳤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6.04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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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소련의 사주와 지원을 받은 북한 김일성 집단이 불법 기습 남침을 함으로써 한반도는 동족상잔의 전화에 휩싸였다.

북한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태평무심 했기 때문에 북한군 남침 3일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다.

당시 남북한 군사력을 비교해 보면 북한병력이 19만여명이었던데 비해 한국은 10만명이었고 전차는 북한이 탱크 242대를 가지고 침공해 왔지만 우리는 단 한 대도 없었다. 항공기도 북한은 221대나 보유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연습기 22대가 전부였다. 또 북한이 552문의 야포를 가지고 있었으나 우리는 91문 밖에 없었다.

분명 6·25전쟁은 당시 소련의 세계 공산화 야욕에 의한 스탈린의 사주와 김일성의 모험주의에서 비롯된 남침 전쟁이었다. 또 그동안 관련 비밀문서에서도 북한의 기습남침을 입증하는 사실적 내용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아직도 ‘북침’운운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6·25 한국전쟁은 공산주의의 야욕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과 국력 신장이나 국방력 강화 노력이 크게 부족했던 데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3년 1개월 동안 계속된 전쟁의 결과는 너무 참혹했다. 님북한 합쳐 5백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가 났다. 또 이름도 생소한 북반구의 작은 나라 한국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4만 명의 UN군이 전사했다.

1951년 4월, 중공군은 70만명이라는 대병력을 한반도에 집결시켜 5차례에 걸친 대공세를 시작했다. 문산에서 화천에 이르는 110㎞의 전선에 중공군 36개 사단과 북한군 1개 군단을 투입해 단숨에 남한 전역을 석권하려고 했다. 하지만 임진강 전투에서 영국군 ‘글로스터’대대는 중공군의 인해 전술에도 굴하지 않고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다. 그 결과 중공군 3개 주력 사단 4만2천여명은 글로스터 대대 800여명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3일 동안 발이 묶였다.

이를 계기로 한국군과 유엔군은 안전하게 철수해 수도권 북방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고 서울을 사수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글로스터 대대원 800명 중 41명 만이 적의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았다. 그들은 말했다. “당신들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오늘을 바쳤다(For your tomorrow, we gave our today)!” 이 처절한 한 마디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그 말이 조국 안보의 옷깃을 여미는 계기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의 전략가 베제티우스는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고 했다. 이 말은 모름지기 국가는 항상 힘을 길러 전쟁에 대비하지 않으면 역사의 제물이 된다는 뜻이다.

6월 25일! 잠깐 타임머신을 타 보자. 총성이 멎고 피난지에서 고향으로 막 돌아왔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학교 운동장에 군용 천막 교실을 지어 수업을 시작했다. 그 해부터 6월 25일은 법정 공휴일로 지정돼 각급 학교, 단체, 기업, 관공서 등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가졌다.

당시 6·25의 날 행사 캐치프레이즈는 ‘상기하자 6·25. 때려잡자 공산당!’이였다. 행사 후 시가행진을 하며 6·25의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부르면 부를수록 치밀어 오는 적개심, 필자도 당시 피 끓는 감정을 어린 가슴에서 주체할 수 없었다. 이 노래가 오늘 ‘7080세대’의 강력한 안보 정신으로 정립됐다는 사실을 그 누가 알겠는가.

6·25의 노래. 지금 그 노래는 어디에 묻혀 있는가? 요즘은 국민안전이 전국적인 화두다. 하지만 국토 안보라는 국가적 명제와 융합될 때 우리는 진정한 공존공영(共存共榮)의 밝은 사회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영조 상이군경회 중구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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