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명정 이야기
구명정 이야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5.25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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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산란해 습관적으로 책을 본다. 어릴 때는 책 살 돈이 없어 책을 못 샀다. 대학 다닐 때는 어렵게 책값을 받아 막걸리를 마시다 보니 항상 책하고는 멀었다. 그런데 교직에 들어와서는 돈만 생기면 책부터 사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1만권 이상의 도서를 집과 연구실에 쌓아놓고 미소를 지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근래 가족이 싫어해 이사를 핑계로 책을 전부 버렸다.

그때 버린 책 가운데 가족이 아까워하는 것이 있었는데 ‘법정스님’의 저서 십여권이다. 책을 버린 그 다음날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스님이 당신의 책을 절판시키라는 말씀을 상좌에게 남기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책값이 정가의 열배 정도로 단 시간에 뛰어 올랐다. ‘무소유’를 버리고 나니 ‘무소유’값이 올라 소유욕이 발동했나보다.

그냥 책 이름이 눈길을 끌어 이용범의 ‘인간 딜레마’를 읽게 됐다. 상당히 두툼한 책이어서 목차부터 보니 ‘구명정의 딜레마’에 시선이 갔다. 이 책은 우리 인간의 여러 모순점을 옛 기록과 연구 결과물을 바탕으로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선택, 도덕, 섹스 딜레마로 구분해 동서양의 예화로 살펴본 인간의 모순된 모습이라고 할까, 이성적이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해부한 내용이 담겨있다. 구명정 이야기는 ‘선택의 딜레마’편에 수록된 소제목 ‘도덕적 판단의 딜레마’에 게시돼 있다. 도덕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 근래 ‘구명정’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관심을 가졌다.

저자는 구명정 이야기 앞에 한비자‘오두’편 초나라에서 한 정직한 소년이 아버지가 이웃집 양을 훔치자 관아에 고발한 일을 적어뒀다. 재상은 소년의 고발이 정직한 행위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고발은 용납할 수 없다고 그 소년을 죽였다. 노나라 사람이 전쟁에 출전했는데 세번의 전투에서 모두 도망쳤다. 공자가 그 까닭을 묻자 늙은 아버지 봉양 때문에 죽을 수 없어 도망갔다는 것이다. 공자는 그를 효자라 판단해 중앙에 천거했다고 한다. 이상의 두가지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기준이 무엇이냐 따라 판단을 달리할 수 있다는 게 바로 ‘딜레마’다.

이제 구명정 이야기를 옮겨 보겠다. ‘공유지의 비극’으로 유명한 작가 개럿 하딘은 1974년 ‘구명정에서 살아남기’라는 논문에서 몇가지 상황을 제시했다. 여객선이 항해하다가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승객들은 침몰 위기에서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구명정에 수용할 수 있는 승객의 수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개럿 하딘은 몇가지 경우를 생각해서 제시하고 있다. 구명정에 타고 있는 사람이 바다 위에 표류하고 있는 승객을 전원 구명정에 태우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부 구조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두번째 선택은 구명정에 태울 수 있는 정원까지만 태우는 것이다. 바람직한 방안이라 할 수 있지만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선발할 권한은 누구에게 줄 것이며 선발 기준은 어떻게 정할 것인가. 그런데 30대 힘센 남자가 다른 승객을 밀치고 구명정에 올랐다면 도덕적으로 비난할 것인가. 세번째는 양심에 호소해서 순서를 정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하딘은 생존 본능이 발동하는 상황에서는 이 세번째 안은 가장 적용할 수 없는 방안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세월호’사건이 자연스럽게 다시 되새겨진다. ‘세월호’ 승객들은 구명정 때문에 토론할 기회나 있었나, 배가 침몰할 때 누가 먼저 바다에 뛰어들까 의논할 기회나 있었나. 순서를 정할 기회도 없었던 많은 희생자들은 다른 세계에서는 인간 세계의 모순을 잊으시길 기원드린다.

<윤주은 울산과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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