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만의 중창과 400년 전쟁의 종식
400년만의 중창과 400년 전쟁의 종식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5.13 22: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연 경관을 감상하면서 한가로이 놀거나 휴식을 취하기 위해 경관이 좋은 곳에 지은 집이 정자(亭子)다. 규모가 크면 누각이다. 경북 봉화는 정자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현존하는 정자 수는 103개다. 전국의 20% 가량이 이곳에 있다. 조선시대 유림(儒林)의 본거지 였는데다 산자수명한 자연환경이 이처럼 많은 정자를 만들었다.

인근의 안동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서원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무려 23개가 있고 향교가 둘이나 있다. 대원군 때 훼철됐다가 이후 복원된 것만 이 정도다. 거의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셈이다. 이러한 배경의 덕택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가장 한국적인 도시’로 소개되고 있다.

지난해 이맘때 안동에서는 400년간의 전쟁이었던 병호시비(屛虎是非)가 종결됐다. 지난해 5월 15일 경북도청 강당에서 열린 ‘호계서원 복설 추진 확약식’에서 영남의 유림은, 호계서원 사당에 퇴계를 중심으로 좌측에 서애, 우측에는 학봉과 대산(大山) 이상정의 위패를 배향하는데 합의했다. 나이가 먼저냐, 벼슬높이가 먼저냐를 싸고 학봉 김성일(1538~1593)과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위패서열 논쟁인 병호시비가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됐다.

시비의 발단은 1620년(광해군 12년) 퇴계 이황을 주향으로 하는 여강서원(1676년 호계서원으로 사액받음)을 건립하면서 종향자인 서애(西厓) 류성룡과 학봉(鶴峯) 김성일 가운데 누구의 위패를 퇴계의 왼편에 둘 지를 두고 발생했다. 즉 애학(厓鶴)이냐, 학애(鶴厓)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시작됐다. 1800년대 영남 4현의 문묘배향과 대산의 위패봉안 등으로 확대된 이 논쟁은 대원군과 고종도 해결하지 못한 조선 최대의 분쟁이었다.

안동은 예로부터 사림들이 많아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와 맹자의 고향인 추나라의 이름을 따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불렸지만 선조의 학문적 지평과 가문의 고고한 자존심으로 400년간의 전쟁을 벌여 오기도 했다. 최근까지도 병파나 호파 중 어느 쪽에라도 가담하지 않으면 양반구실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갈린 가문끼리는 벗을 삼지도, 혼인도 하지 않았다.

울산의 명물 태화루가 소실된 지 400여년 만에 오늘 중창 준공식을 갖는다.

태화루는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12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사포(絲浦·지금의 태화동 화진(和津) 일대)에 상륙해 지은 태화사와 비슷한 시기에 창건됐다. 오랜 세월 중건을 거듭했던 태화루도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선조 26년(1593) 7월 8일 전투와 1차 도산성(지금의 학성) 전투(1597) 때 왜적의 태화적루(太和賊壘)가 있었기 때문에 큰 격전이 있었던 곳이다.

오늘 태화루 중창의 의미가 크다.

먼저 태화루가 울산의 명승(名勝)으로서 고려말 정포(鄭浦)가 노래한 이래 울산 8경(景)의 중심지가 돼 왔다는 것, 고려의 김극기(金克己)나 이곡(李穀) 등은 물론 많은 선비들이 시문(詩文)을 남겨 지역소재 문학의 산실 역할을 했고, 전란으로 소실된 이래 입소문과 기억 속에서만 있던 누각이 생생하게 우리 곁에 돌아왔다는 큰 의미가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급할시’와 ‘산업수도’로서 가장 부족하기 쉬운 문화·역사 등의 인문학과 정신문화 융성에 커다란 초석이 마련됐다는 점이다.

태화루 중창을 계기로 개인소득뿐만 아니라 문화와 교양에서도 앞서가는 도시로 만들어 가길 기대한다.

<임상도 논설위원>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