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공중전화 박스
텅 빈 공중전화 박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4.27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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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서 볼 일을 본 후 고속버스 차편을 알아보기 위해 근처 터미널에 들렀다. 평일이어선지 터미널 안은 북적이는 도심에 위치해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한산했다. 나는 우선 그 한가로움이 좋아 터미널 내 한 가운데 즐비하게 놓여 있는 의자위에 몸을 부렸다. 서너 시간은 좋게 다리품을 팔았던 터라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말랐던 것이다.

나는 의자 위에 편안히 앉아서 안을 한 바퀴 휘 둘러봤다. 매표소 앞에는 몇몇 사람들이 표를 사기 위해 서 있었다. 매점 앞에는 과자를 사 달라며 손을 끌고 있는 꼬마와 허리 굽은 할머니가 지갑을 뒤적이는 외에 달리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도심의 섬처럼 이렇게 한가로울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이하게 느껴졌다.

구석진 자리, 오가는 사람들의 구두를 닦아주는 사람도 무료하기 짝이 없다는 듯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내 눈은 무심코 한 곳에 그대로 정지하고 말았다. 허름한 모습으로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공중전화 박스.

‘아, 그래. 네가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구나.’

넌 언제부터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것일까. 나는 그동안 잊었던 존재의 깨달음과 줄줄이 딸려 나오는 옛 기억 속으로 간단없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전화를 한번 이용하기 위해 참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었다. 변두리 동네에는 공중전화 시설이 없어서 전화를 걸기 위해 십 분 이상을 걸어 나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날씨가 좋을 때는 그래도 크게 힘들지 않았지만, 추운 겨울이나 비가 오는 밤 시간에 전화를 한번 거는 일은 정말 큰일이었다. 찬바람을 맞으며 공중전화 박스까지 간다는 건 적잖은 결심이 필요로 했다. 그래서 겨울 밤 공중전화 박스는 안에 불만 켜 진 채 덩그라니 홀로 서 있었다.

공중전화기 앞에는 대부분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길게 늘어선 줄 뒤꽁무니에서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일은 고역이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지만 막상 전화기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의 통화는 왜 그렇게 길기만 하던지. 그래서 한 때 ‘공중전화 에티켓’이란 게 생겨났을 정도다.

그러다 보니 오랜 시간을 기다려 드디어 내 차례가 돼 전화를 할라치면 왜 그렇게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눈치가 보였던지 모를 일이다. 만일 인상이 험상궂은 사람이 바로 뒤에 서 있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용건만 간단히 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기가 일쑤였다.

당시에는 공중전화 예절이 사회적인 문젯거리로 늘 시시비비의 대상이 되곤 했다. 가끔 공중전화를 오래 사용하는 사람과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 사이에 주먹다짐이 오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우리의 삶이 팍팍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사춘기 시절, 좋아하는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오래오래 줄을 서서 기다리곤 했던 일은 그야말로 아날로그 시대의 미소 어린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나는 그날 오래오래 텅 빈 공중전화 박스를 바라봤다. 휑뎅그렁한 그 속으로 무심한 바람만 들락거리고 옛 화려했던 전성기를 그리워하는 듯한 모습은 마냥 쓸쓸하기만 했다.

공중전화 추억만큼이나 우리의 삶도 시간을 넘었다. 따뜻한 봄날이건만 왠지 내 속으로도 서늘한 바람이 이는 것만 같았다.

<전해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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