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주의’와 ‘편법주의’ 더 이상 안 된다
‘적당주의’와 ‘편법주의’ 더 이상 안 된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4.27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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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진도 인근 바다 ‘맹골수도’에서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가 희생자 가족은 물론 온 국민을 정신적인 패닉 상태에 빠뜨리고 있다. 이번 사고로 인해 현재까지 집계된 인명피해(사망자와 실종자)가 302명에 달하고 있으며, 이 중 나이어린 고등학생들이 250명이나 포함돼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이번 사고를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선박시설의 무단 개조, 무리한 선적에 의한 복원력 상실, 과도한 변침 및 조타 등 선원들의 운행 실수가 주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선박 침몰 직후 선장을 포함한 선원들의 대처능력 부족, 이들의 어설프고 무책임한 행동, 그리고 조직적이고 일사불란한 해난구조 부재 등이 겹쳐 참혹한 인재를 초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참사는 1970년 12월15일 에 발생한 ‘남영호’ 침몰사건(인명피해 326명)과 1993년 10월 10일에 일어났던 ‘서해페리호’ 침몰사건(사망자 292명)에 이은 대형 해난참사로 기록될 것이다. 이미 ‘남영호’와 ‘서해페리호’ 침몰사건의 원인으로 밝혀진 적재량을 초과한 과적, 선원들의 항해 부주의, 사고 직후 신속하지 못한 대처 등이 또다시 이번 ‘세월호’ 참사의 원인으로 드러나고 있어 이제는 실망감을 넘어 온 국민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왜 이러한 대형 참사가 똑같은 형태로 반복되는 것일까? 두 번이나 큰 해난을 당하고 나서도 사고의 원인이나 문제점을 치유하지 않고 그대로 답습해 온 데에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적당주의’와 ‘편법주의’가 대형 사고를 일으키는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선박회사의 부실경영, 과도한 선박개조, 무리한 선적행위, 어설픈 운행기술, 허술한 구조체계 등이 바로 ‘적당주의’와 ‘편법주의’가 낳은 전형적인 산물이다.

‘적당주의’는 어떤 일을 임시변통이나 눈가림으로 적당히 넘기려는 태도나 입장을 말하며 ‘편법주의’란 불법은 아니나 법과 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부정한 이익을 챙기는 태도나 입장을 의미한다.

‘적당주의’와 ‘편법주의’는 마치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번 사건에서도 ‘항만관청의 적당히 봐주기’와 ‘선박회사의 편법행위’가 야합함으로써 결국은 대형 참사를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적당주의’나 ‘편법주의’는 ‘아노미(anomie) 현상’ 즉, 사회 구성원의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된 가치나 도덕적 규범이 상실된 혼돈상태가 지속될 때 횡행한다. 우리 사회에 이러한 현상이 만연한 것은 1960년대 이후 고도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지나친 성과주의와 능률화에 치중한 나머지 무슨 일이든지 그 절차나 과정은 등한시하고, 정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향을 갖게 된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앞으로 대형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적당주의’와 ‘편법주의’를 지양하고 사회 전반에 ‘준법정신’을 불어 넣어야 한다.

‘준법정신’이란 바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약속한 법규나 사회규범을 지키려는 정신을 말한다. 이러한 ‘준법정신’은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힌 현대 산업 사회에서 그 사회가 정한 공동 약속으로서의 법질서를 어겼을 경우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에 커다란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번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법대로 살면 오히려 손해를 본다’는 잘못된 의식을 과감히 떨쳐야 한다. <이창형 울산대 경제학과 교수>

요즘 생겨난 신조어 중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것이 ‘힐링’이다. 예전에는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용어지만 요즘 들어 사람들의 상용어로, 희망어로 들릴 만큼 자주 회자되고 있다.

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손상된 감정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힐링’ 열풍이 불게 된 것 같다. 보다 안정되게 살고 싶은 인간의 기본욕구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심신이 안정되고 회복이 될까? 이 화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였는데 우연히 작은 해답을 얻는 계기가 있었다.

해외에 근무 중인 작은 딸아이가 짧은 휴가 기간임에도 기어이 집에 다녀가겠다고 했을 때 비행기 삯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만류를 했지만 이미 예매를 마친 상태라고 했다. 요즘 젊은 애들은 돈 아까운 줄 몰라 큰일이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감춘 채 딸아이를 맞았다. 그동안에도 늘 그래왔듯이 너무 자주 집에 오고가서 항공료 지출이 많았었다. 항상 그것이 못마땅했지만 집이 그립다는 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욱더 집에 오고 싶었다며 병이 날 지경이었다고 했다. 집에서 그저 엄마가 해주는 음식만 먹고 가겠다고 벼르고 별러서 왔다고 했다. 회사동료들의 축제참여나 근사한 권유에도 오로지 집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버텨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아들이 서울에서 대학 다닐 때 크게 한번 아팠던 기억이 났다. 처음엔 원인이 무엇인지 잘 몰랐는데 결국은 향수병 같은 것이 원인이 됐던 듯 했다. 필자가 해준 밥을 먹고 몇 시간 함께 있는 것만으로 원기를 회복한 일이 있었다.

늘 바쁘다는 핑계로 살뜰하게 챙겨주지 못하지만 애들은 그래도 ‘집밥’이 최고라고 한다. 중·고등학교때 새벽에 나가는 자신들에게 한입이라도 더 먹게 하려고 차타는 곳까지 따라와 입에 넣어주었던 김치만 넣은 김밥과 김치볶음밥이 군대 첫 휴가 때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이었다고 했다. 이런 것이 결국 ‘가족’의 힘이고 ‘가정’의 에너지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혼기에 접어든 두 아이가 각자의 삶을 꾸려 나가느라 좌충우돌하고 있는 요즘 본인들은 점점 더 가정과 가족이 소중함을 알게 된다면서 부모 세대의 정을 나누는 문화가 한편으로 부럽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부모 세대처럼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싶은데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 이웃에서 부모와 함께 공동체로 살아갈 것이라고 한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 세대를 불문하고 인간의 삶에는 ‘정’이 얼마나 중요하며 특히 ‘집’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크건 작건 귀하거나 하찮거나 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족 간의 사랑이며 정이다. 그런데 그것을 나눌 가장 원초적인 곳이 바로 ‘집’이다. ‘집 밥’이 주는 의미는 크다. 남자들 특히 아버지들이 왜 ‘집’에서 밥을 찾는지 이유를 알만하다. 따뜻한 온기가 있는 그 곳에서 늘 맡아왔던 추억의 향기와 익숙하게 보아왔던 가족들의 모습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에너지로 하루를 보낸다. 곧 5월이다. 우리 모두 5월에 가정의 소중함을 몸으로 다시 느껴보자.

<이미화 한국다문화 희망협회 울산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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