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의 자질
지도자의 자질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4.21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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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만 하면 일어나는 대형인재사고소식이 우리를 무겁게 한다. 지난 2월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 소식을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번엔 여객선 세월호가 승객 475명을 태우고 진도군 맹골수도에서 침몰했다. 그 과정에서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과 교사 등 수 많은 승객이 미쳐 빠져 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선장과 승무원다수는 제일먼저 빠져나왔다. 승무원의 ‘자리를 지키라’는 안내방송을 믿다가 끝내 빠져 나오지 못한 학생들을 생각하면 심한 자괴감에 빠진다.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 화재사고, 씨랜드 참사 등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대형인재참사는 혹시 ‘책임질 위치의 지도자들이 잘못된 게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한국사에서 잘못된 지도자의 판단으로 실패한 대표적인 예로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 구한말 이완용의 한일합병 등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의 공통점은 지도자의 상황판단 미숙과 위기관리능력 미흡으로 그 지도자를 믿고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나라가 위태로워졌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 다대포진, 그리고 동래성이 점령당하고 상주에서 이 일장군의 조선군마저 전멸한 상태에서 조선의 최고명장 신립장군이 충주로 간다. 신립장군의 조선군은 대부분 기병으로 조선군으로써는 최후의 카드였다. 신립장군은 기병전의 명수로 여진족을 물리칠 때도 강력한 기병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신립의 참모였던 종사관 김여물등 모든 참모들은 조령에서 적을 막자고 했다. 하지만 신립은 이 의견은 무시하고 넓은 야전인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당시 조선군은 8천명, 일본군은 1만5천명이었다. 전투당일 비가 내려 들판이 질퍽한 늪지대로 변해 기병대가 제 기능을 다 할 수 없었다. 이런 조선군기병대에게 왜군은 조총과 창으로 공격해 조선의 마지막 희망 기병대가 전멸했다.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은 전략과 전술에 결정적 문제가 있었다. 일본군의 신무기인 조총의 위력을 몰랐다는 것, 문경세제를 버리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것과 전투장소와 때, 병사의 사기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의 자만심이 패전을 불러왔다.

원래 친미파인 이완용은 대한제국의 외교권 강탈을 위해 입국한 이토 히로부미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고 이후 친일파로 변모했다. 을사조약을 체결해 을사오적으로 처벌받아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치자 그는 “외교권을 잠시 빌려준 것”이라며 “국력을 키워 되찾아오면 된다”고 했다. 경술국치 조약 체결 후에도 “지금은 일본이 대세이므로 일본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일합방 이후에도 “조선과 일본은 같은 민족, 같은 뿌리, 한일합방은 동양평화를 위한 길이다. 따라서 조선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조선민족을 멸망시키고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것”이라며 그를 손가락질 하는 무식한 백성에게 오히려 연민을 느낀다고도 했다.

그는 ‘친일로 뚜벅뚜벅 걸어간 것도 고뇌 끝의 결단’이라고 변명했을지 모른다. 고종에게는 끝까지 의리를 지킨 합리주의자로 ‘조선은 어차피 자주국방이 불가능한 나라이며 경제 자립이 어렵기 때문에 일본과 합병해서 잘살게 해주는 것’이 당시 이완용의 구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잘못된 판단이 한일병합이후 3·1운동,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독립운동전쟁 등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고 그는 만고의 매국노로 남게 됐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보다 대한제국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며 최후까지 적과 결전했다면 우리가 바라는 참 지도자 상으로 남았을 것이다. <김갑수 대현고 교사·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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