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하게 살만한 곳이 없다
안전하게 살만한 곳이 없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4.2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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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바다를 보며 낭만을 논하거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릴 수 없을 지경이 돼 버렸다. ‘대한민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며….’ 굳이 지도를 펴 보지 않아도 바다는 우리와 일상을 함께 하는 공간이었다.

어릴 때는 광안리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곳에서 살았고 지금도 차를 타고 30분만 달리면 동해바다가 넘실거리는 울산에 살고 있다. 내 정서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의 정서나 감성의 일정부분은 바다가 제공해준다. 해변가에 면하고 있는 카페와 휴양지만 봐도 바다는 인간에게 삶의 쉼표를 아낌없이 내어주는 곳이다.

넉넉하게 말없이 모든 것을 품어주던 바다는 순식간에 이중성을 드러냈다. 태풍도 불지 않았던 평온한 바다는 아침햇살 아래서 6천t의 배를 집어삼키고 그것도 모자라 이백 여명의 생사마저 모르는 아비규환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승객을 버리고 탈출한 선장의 굳은 입만큼이나 바다는 공범인 양 말이 없다. 진도 앞 바다의 거센 조류와 기상악화는 실종자 가족들의 애끓는 심정마저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 모든 악조건에도 가라앉은 선체 어디엔가 사랑하는 가족이 살아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있다.

새 정부 들어 복지국가와 사회안전망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거창한 공약에도 불구하고 복지사각 지대는 여전하고 국민들이 안전하게 믿고 살만한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 하는 아파트 엘리베이터는 CCTV를 달아야 할 만큼 불안한 공간이고 늦은 밤에 여자 혼자서 택시를 타는 것은 이미 위험천만한 일이 된지 오래 전이다. 아이들 단체 활동이나 수학여행은 명을 재촉하는 저승여행길이 되고 말았다.

어디 뱃길만 문제인가. 영화관을 가보면 방음장치 때문인지 바닥에는 이중삼중으로 두꺼운 카펫이 깔려있고 사방이 커튼으로 둘러쳐져 있다. 안락한 의자와 대형화면, 3D, 4D 같은 첨단시설을 자랑하지만 정작 출입구와 복도는 좁은데다 미로 같은 곳도 있다. 만약, 하필이면 내 가족 중 누군가 영화를 볼 때 불이라도 난다면 재수가 없거나 운이 나쁜 걸로 치부할 수 있을까. 하필 왜 우리아이에게 이런 일이 생겼냐며 울부짖던 실종자 학부모의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또 붉어진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갔던 이발소나 친구들 집의 안방 벽에 흔하게 걸렸던 유리 액자 그림이 문득 생각난다. 금발머리를 한 외국소녀가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소녀 옆에는 ‘오늘도 무사히’란 글귀가 쓰여 있었다. 그때는 나라가 가난해서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그림을 보며 무사안녕을 빌었을지 모른다.

그 옛날처럼 방 한가운데 소녀의 기도하는 액자를 걸어놓고 내가, 내 가족이 하루하루, 오늘도 무사하기를 기도해야 하는지 되묻고 싶다. 잔인한 봄을 두번 다시 맞고 싶지 않았는데 놀란 가슴이 진정도 되기 전에 또 아이들이 희생됐다. 누구를 탓하랴. 안전불감증이란 불치병은 죽지 않은 좀비처럼 우리 곁을 떠돌고 있으니.

고래 등같이 남아있던 세월호의 뱃머리가 완전히 바다에 잠겼다. 실낱같은 희망마저 가라앉은 선체와 함께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시간이 흐르면 지치고, 지치면 관심이 사라지기 마련. 언제나 그랬듯 양은냄비처럼 부글부글 끓다가 싸늘하게 식은 국처럼 되지나 않을까.

진도 앞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배와 고무보트, 수많은 잠수부들,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피가 마르는 부모들의 심정이 기적으로 이어지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실종자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길밖에 없음을.

<박종임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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