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쓰기, 신문이 나서라
우리말쓰기, 신문이 나서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2.26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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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60년 4·19 직후,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간판을 ‘배꽃 계집 큰배움집’으로 잠시 바꿔 단 적이 있었다. 당시 새로 집권한 민주당 정부와 4·19를 주도한 인사들이 이승만 정권의 잔재를 없앤다며 했던 일이다. 이때의 우리말쓰기 움직임은 다분히 정치적 색깔을 띠고 있었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단행한 직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박 대통령이 1인 장기집권체재를 구축하자 미국이 직·간접적으로 군사·외교적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때 유신정권은 외국, 특히 미국의 간섭을 못마땅해 하면서 ‘우리말 쓰기’를 시작했다. 나중에는 언어정화 운동으로까지 번져 갔다. 결국 외국어로 표기된 길거리 간판들이 된서리를 맞았다. ‘레스토랑’이란 간판이 경양식집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축구시합을 중계하는 아나운서가 ‘코너 킥’ 대신 ‘구석차기’라 했고 ‘골키퍼’를 ‘문지기’라 했던 시절이다.

이렇게 정치·권력이 임의적으로 필요할 때 마다 이용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요즘의 우리말 찾기는 매우 순수하다. 외설스럽고 낯선 외래어보다 고운 우리말을 찾아 쓰려고 하는 경향은 물질적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신세대에서 두드러진다. 페이지(page)란 말 대신 ‘쪽’이란 순 우리말을 사용하고 신입생이란 한자어(漢字語)대신 ‘새내기’란 신생어를 만들어 냈다. 70년대에 사용하던 서클(circle)이란 용어를 요즘 세대들은 거의 모른다. ‘동아리’라고 해야 알아듣는다.

그런 세대 변화 탓인지 최근에는 공공기관, 기업체들도 순 우리말을 즐겨 쓴다. 대표적인 예가 도우미다. 도움이란 우리말에 사람을 뜻하는 ‘이’를 붙여 발음 나는 대로 표기한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 지킴이, 돌보미, 새로미 등이다. ‘누리마루’라는 아름다운 우리말도 있다. 세상을 뜻하는 우리말 ‘누리’와 꼭대기를 일컫는 ‘마루’를 합성한 것이다. 즉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이란 의미다. 2005년 11월 부산 APEC 정상회담이 개최된 곳에 붙여진 아름다운 우리말이다.

이런 자생적이고 자연스런 우리말 쓰기 흐름에도 불구하고 영상매체 그중에서도 특히 흥행·오락물 쪽으로 가면 국적이 의심될 정도로 외래어 범벅이 돼 있다. 지난 90년대 초 우리나라에 랩 음악을 처음 소개한 가수가 서태지다. 그런데 아직도 이 가수의 이름이 ‘서(徐)태지’인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착오다. 그의 본명은 정 현철이다. 무대를 뜻하는 stage를 발음 나는 대로 옮긴 것이 바로 ‘서태지’다. 요즘은 상당수 연예인들이 앞뒤도 맞지 않고 말도 되지 않는 외래어 이름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노래 가사(歌詞)는 웬만한 외국어 지식을 가진 사람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외래어와 국어가 뒤엉켜있다.

그런데 이쪽이야 흥행·오락물을 다루고 그 주 대상이 청소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공공기관이 이런 외국어 범람에 한 몫 거들고 있으니 문제다. 지자체들이 내보는 각종 자료를 보면 ‘프로젝트’, ‘마켓팅’, ‘에코’, ‘디자인’, ‘인프라’ 등의 외래어 표기가 여과 없이 사용되고 있다. 태화강 십리대밭에 원어(原語) 그대로 ‘에코 폴리스 울산 선언’이라고 돌에 새겨져 있었다. 그 비석 옆 휴게용 의자에 앉아 있는 60~70대 지역민들이 과연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을까.

‘우리말 쓰기’에 신문이 앞장서야 한다. 영상매체는 시각적 효과에 주 기능을 두기 때문에 활자매체가 이런 책임을 맡는 것이 적합하다. 시민들이 생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지면을 통해 수시로 기존의 외래어가 적절한 우리말로 바뀐 것을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업에 지역민, 학계, 지자체 그리고 울산의 활자매체 언론이 동참할 것을 제의한다.

<정종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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